시와 비평

<올해의 좋은 시> 푸른사상, L의 외출

바냔나무 2011. 6. 1. 02:47

 


L의 외출
                       
김영찬





엘이 외출한다
L상표의 엘
L의 조급한 외출준비, 저것 좀 봐, 엘이
빨래줄 위에서 춤추네!

채 마르지도 않은 속옷L,
유명상표인 리넨 거들이 건들건들 건조대에서
쿨럭쿨럭 바튼 기침도 해대며
엘을 맞는다

엘은 L을 데리고 아니,
L은 엘을 데리고
외출한다
만일 L이 엘을 뿌리치고 떠나는 날엔 엘은 영락없이
국적 잃은 미아
샴푸머리 푸수수한 엘


향수냄새 팡팡 진한 L의 몸뚱이에 갇혀
엘이 외출한다

 

 


   이 시에 등장하는 엘은 사람의 이름이고 L은 엘이 갖고 있는 상표의 이름을 말한다. 1연에서 실제로 외출을 준비하고 행동하는 것을 엘이지만, 엘은 L을 뽐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작 외출하는 것은 L이라고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2연에서는 그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3연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엘이 L을 데리고 외출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의 상황인지……. 또한 L이 없으면 엘은 미아가 되어버린 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통해 우리는 브랜드에 맹목적으로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명품, 즉 브랜드 있는 상품을 갖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는 자기만족 이며,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자신을 가꾸기 위한 적당한 사치는 필요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에 포함된 인격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 더욱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이은봉(시인. 광주대학 교수)

*<올해의 좋은 시> 푸른사상 (2010년 간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