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비평

김영찬이 읽은시―김지녀의 ‘발설’ (평문)

바냔나무 2011. 4. 27. 02:04

김영찬이 읽은시―김지녀의 ‘발설’ (평문) 



발설 


김지녀





조개처럼 두 개의 껍데기가 있다면

스스로 나의 관 뚜껑을 닫을 수 있겠지

닫히는 순간 열리는 어둠 속에서

나는 가장 사적이고 사색적인 공기를 들이마시고

모래나 바다 속으로 숨어버릴 거야

입술이 딱딱해질 거야

오늘은 무얼 먹을까?

어떤 옷을 입지? 이런 걱정들로 분주한

나의 인생을 어리고 부드러운 속살로 애무해줘야지

내 몸 어딘가에 있는 폐각근閉殼筋을 당겨

살아 있는 동안

죽어 있는 것처럼

한 번 닫히면 절대 열리지 않을 테다

이런 생각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다섯 개나 열두 개의 주름을 만들어

감추고 싶은 말들을 꽉 물고 놓아주지 않을 테다

두 손을 모아 기도할 거야

하나의 사원처럼

돌멩이처럼

조개는 고요하고 엄숙하다

죽고 난 뒤에 입을 벌린 조개껍데기 속 무늬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시간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계간 『시인시각』 2010년 가을호

 

 


발라드풍의 경쾌한 리듬에 실린 시

 

                                                                                       김영찬(시인)

 

 


 김지녀의 시를 대하는 것은 경쾌한 음악과의 만남, 기다리던 벗이 찾아왔거나 오래 친견하고 싶었던 손님을 맞이할 때의 설레임처럼 즐겁다. 그가 구사하는 발라드는, 박자를 의식하지 않고도 언제 어디서 누구하고나 부담 없이 춤출 수 있는 무도곡이다. 우리는 왜 김지녀의 음악이 싱싱하고 신선하다 못해 발랄하기까지 하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그의 언어가 젊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문장/문체에 엇박자 진 문맥이란 없다. 걸리면 에돌아 갈 샛길이 얼마든지 마련돼 있고 샛길이 따로 없으면 새로운 길을 만들어 걸어갈 수 있는 여백, 여유가 풍족하다. 그가 산들산들 춤추어 스텝을 밟는 보법대로 시행을 따라가 보자.


조개처럼 두 개의 껍데기가 있다면

스스로 나의 관 뚜껑을 닫을 수 있겠지

닫히는 순간 열리는 어둠 속에서

나는 가장 사적이고 사색적인 공기를 들이마시고

모래나 바다 속으로 숨어버릴 거야


 껍데기가 딱딱한 패류(貝類), 조개의 껍데기를 메타포어로 차용한 이 첫 문장은 그러나 조금도 딱딱하거나 완고하지 않다. 조개껍질이 있다면 그것으로 자신의 관 뚜껑을 닫을 수 있을 거라고 섬뜩하게 표현하건만 웬일인지 <조개껍데기>, <관 뚜껑>같은 단어들이 속살, 배꼽처럼 편안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그 다음 셋째 행에서조차 ‘닫히는 순간 열리는 어둠 속’이라고 의기소침한 페시미즘을 발설하건만 그것은 마치 앳된 소녀가 가녀린 입술을 오므렸다가 열 때 내는 모음처럼 들릴 뿐 아무런 의미의 중압감을 싣지 않는 문맥으로 흘러든다. 그것은 그가 말하듯 ‘가장 사적이고 사색적인 공기를 들이마시고/모래나 바다 속으로 숨어’버리려는 장난기 섞인 어법으로 익살을 담보했기 때문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인지하기 위해 다음 행으로 보폭을 옮겨보자.


입술이 딱딱해질 거야

오늘은 무얼 먹을까?

어떤 옷을 입지? 이런 걱정들로 분주한

나의 인생을 어리고 부드러운 속살로 애무해줘야지

내 몸 어딘가에 있는 폐각근閉殼筋을 당겨

살아 있는 동안

죽어 있는 것처럼

한 번 닫히면 절대 열리지 않을 테다

이런 생각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다섯 개나 열두 개의 주름을 만들어

감추고 싶은 말들을 꽉 물고 놓아주지 않을 테다


 이처럼 경쾌하다 못해 모든 시어가 산화해버리고 종이 위에, 정작 원고지 위에는 아무

것도 남겨 놓지 않을 것만 같은 문맥의 흐름은 김지녀 특유의 기법이다. 즉 첨예한 그의 감수성이 언어라는 부드러운 질료와 만나서 유연하게 타협한 결과이다. 그는 시가 가야할 길이 굳이 점령해야 할 의미의 봉우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의미의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언어를 다루되 그것을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로 여기지 않고 의미와 더불어 하늘하늘 춤추며 공생하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의미의 족쇄에 묶이지 않고 오히려 의미의 멍에에 꽃다발을 얹어 함께 멀리 나아간 셈이다. ‘나의 인생을 어리고 부드러운 속살로 애무해줘야지’라는 구절을 ‘나의 시(詩)를, 의미(意味)를 어리고 부드러운 문장으로 애무해줘야지’로 바꿔 읽어도 속뜻이 변하지 않을 게 분명한 것은 ‘감추고 싶은 말들을 꽉 물고 놓아주지 않을 테다’라고 힘주어 말한 발설만으로도 증거삼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두 손을 모아 기도할 거야

하나의 사원처럼

돌멩이처럼

조개는 고요하고 엄숙하다

죽고 난 뒤에 입을 벌린 조개껍데기 속 무늬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시간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우리가 듣고 만지고 보고 감지하는 것들은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 우리의 감관이 비주얼(visual)한 것에만 경도 돼 있을 때, 김지녀는 보고 듣고 만질 수 있으나 그것들의 실체를 의심하고 접근하기 전에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로 사물에 접근하는 법, 그것은 어디까지나 언어를 통한 세계일뿐이라는 것을 여기서 인지시킨다. 왜 언어의 사원인 시(詩)라는 돌멩이는 죽고 난 뒤에 입을 쩍 벌린 조개껍질처럼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시간들’을 가둬 층층이 쌓아두기만 할까. 약간은 교도적인 이 한 마디의 의문을 전달하려고 시인은 굳이 <발설>하지 않아도 될 긴 문장을 썼다. 하지만, 그가 춤추듯 노래하듯 이끌어온 발라드풍의 즐거운 리듬에 취해 우리가 여기가지 이렇게 속아 넘어갔어도 우린 조금도 억울해하지 않는다.

김영찬(시인)

 

*계간 <시와표현> 2011년 1월 창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