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비평

김영찬의 시 <고독 강점기> 단평/박병수 시인

바냔나무 2011. 6. 6. 14:34

 

고독 강점기 


 김 영 찬



 

 생각해보니 뭐 그렇게 심각할 것까지 없고

 허리 꺾어 8부 능선 더듬다가 문득 잉크 묻은 손톱 밑 내려다보니

 나에게 고독 강점기라는 게

 있기는 있었네

  

 토리노에 대해서 알긴 뭘 알아 돌아서려다가 오른손 잠깐 뻗어

 하복부 저점 사타구니 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파베세에게 물어보지 못한 것들이 대퇴부 골짜기 홈 패인 곳마다

 무덤을 쌓고 있었네

  

 리노에 대해서가 아니겠지 코나투스에 대해서 알긴 뭘 안다고

 체자레 파베세의 옆얼굴 훔쳐보며 뒤적뒤적

 가로등 꺼진 그 골목길

 나에게도 분명 분명히 고독 강점기라는 게

 옹이 박혀 있었네 

 

      —계간 <미네르바> 2011년  봄호에서 발췌 


 

 

 파괴되거나 왜곡된 시의 본질을

 미세한 떨림과 뉘앙스만으로

 설득,

 감상하도록하는 시인

                                                                                                               박병수(시인)

 

 

 

 

  ‘종교를 포함한 모든 예속으로부터의 자유’야말로 진정한 자유라고 선언하였던 스피노자(네덜란드)는 “코나투스(살고자하는 욕구 내지는 의지)”의 완전한 표출이야 말로 행복'이란 말을 함으로써 사상과 철학에 다소나마 혼란을 느끼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권력(욕망)이 가진 구속력(의지력)은 태생적인 이유에서나 지속성을 위한 이유에서 절대善이거나 최상의 수단(선택)일 수는 없을 것이다. 타자는 지금 [고독 강점기]란 작품에서 암울했던 상황(체자레 파베세의 도입에서 유추)들을 극복해내고 마침내 현재에 도착한 자신과 의지력(코나투스)을 착잡한 심정으로 어루만지는 화자를 만나고 있다. 작품에서 보여 지는 것은 ‘폭력성(무너지고 싶은 마음)’에 혼신으로 저항하나 목덜미(8부 능선)를 점령당한 ‘젊은 시절과 가치관’이 한 인간의 의식에 어떤 규모(토리노만한 크기로 이해)의 자괴감으로 깊이 패여 있는지, 그리고 어느 순간 가질 수도 있었을,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현실체념의 유혹으로부터 젊은 시절의 열정은 어느 지점에서 얼마나 심각하게 갈등하였는지 하는 부분들이다. 인생에서 스스로 유폐시키거나 포기하였던 ‘이상’은 왜 항상 꼬리뼈 부근에서 만져지는 걸까? 그것들이 긴 잠에서 깨어나 복구를 갈망하는 목소리로 불쑥 다가왔을 때, 과거로 회귀하거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파악하는 등의 일련의 갈등에서 누구라도 담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애써 감추고 살아왔을, 화자의 고단했을 지난날을 떠올리게 하는 ‘코나투스에 대해서 알긴 뭘 안다고’란 본문의 짧은 독백 부분에서는 당시의 상황이 실감 있게 와 닿는다. 지난날의 어떠한 서러움이나 유사한 아픔들도 현재의 나를 만든 조력자란 사실을 알면서도 과거는 누구에게나 조용하고 우울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모양이다. ‘코나투스’를 되뇌이는 화자의 젊은 시절을 목격하지 못한 처지에서도 폐허같이 두고 왔던 젊은 시절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퇴부 골짜기’에서 발견하고 더듬는 화자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회한마저도 화자와 공유하게 되는 이유가 착시 탓은 아닌 것이다. 전혀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시적사유를 확장해나가는 특유의 작법이 김영찬시인 다운 독특함이다. 울툭불툭한 어투 역시도 그가 (詩作에서 추구하는 디커플링(Decoupling.차별화)을 위한 의도성일 것이란 생각이다. ‘오른손 잠깐 뻗어 하복부 저점 쪽으로 더듬어’며 마음껏 발산하지도 가꾸지도 못했던 젊은 날을 억울한 주검처럼 위로하는 우울한 서정이 문장 이곳저곳에서 시인의 목소리를 대신하고 있다. 문장의 구성에 있어서 파괴되거나 왜곡된 [본질]과 [의미]등의 전달 방식으로 발음의 미세한 떨림과 뉘앙스만으로 감상을 설득하려는 시인의 의도는 이 작품에서도 충분히 발견된다.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토리노, 체자레 파베세, 코나투스’등의 도입에서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관계성을 떠난 존재란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을 것’이란 시인의 의식세계이다. 모든 詩작품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에서도 일체의 정적이거나 동적인 모든 형상이나 사물에 대한 생명력은 시인이 인정하였거나 부여하였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화자는 ‘문득 잉크 묻은 손톱 밑’에서 과거의 자신을 만나고, 전전하던 도시에 도착하고, 젊은 날에 동경하였던 한 인물과 우호적으로 만난다. 그리고 그 순간의 심정을 특유의 기법으로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나 사상은 물론이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륜이나 도덕성, 관습을 망라하더라도 구속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문장에서 확인되는 시인의 윤리와 경험은 지극히 인간적이기 때문에 투박한 어투에서 다만 일말의 인생역경을 느낄 수가 있다. 상처나 쓰라린 고통 따위의 기억은 비밀스런 장소에 보관하지 않더라도 항상 우리 안에 머물거나 불시에 나타난다. 詩[고독 강점기]를 감상하는 동안, 내 안에서도 수면 중이던 숱한 ‘대퇴부 골짜기’들이 깨어난다. 강제로는 어떤 형상이나 현상에도 접근할 수 없는 詩의 형질과 작품에서 느낀 ‘관계성’에 대해서도 한 번쯤 심사숙고할 일이다.

 

단평

박병수  시인  :   2010년  격월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시산맥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