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석기에 장착한 언어감각, 미음(味音)을 캐다/김영찬(단평)
미음味音
—담양조찬潭陽朝餐
한우진
담양에 와서야 내 귀가 두 짝인 걸 비로소 알겠다
떡갈나무 마른 이파리가 부르르 떤다 : 쿠쿠밥솥의 압력추
산꿩이 날아오르며 목청을 뽑아재낀다 : 축이 기운 벤츄레이터
댓잎에 닿는 빗소리 점점 굵어진다 : 냉이국이 끓는 돌냄비
공장에서 나온 저것들이 입산하여
잎이며 물방울이며 새의 간결함을 닮아 같아졌구나
벼락이 친다, 대추나무 우듬지가 짜개진다 : 세설원1)스카이라이프 접시
천둥소리에 놀라 내가 놓친, 식탁모서리를 들이받은 굴비접시나
천둥소리를 받아낸 안테나접시나 ; 허어 잠깐의 하늘인생
닮았구나, 들이받을 때가 더욱 서로 닮았구나
노루냐 고라니냐, 노루더냐 사슴이더냐
녹사불택음1), 소리가 아니라 그늘蔭이구나
먹구름과 정면 대결하는 문학제1)의 낯짝에
덜꿩나무가 그늘을 던진다 수심이 깊어진다
수심 깊어 혼자 먹는 담양의 아침,
더 남행하고 있는 사람아
나는 보내지 않았는데, 눈물로 남쪽을 향해 간 사람아
내 눈썹 끝에 끌어올린 사랑 얼얼하다, 불붙는다
그대 머문 곳과 내가 떠도는 사이에 낀
라이닝이 닳는다 문재1)를 넘어가는 자동차
와이퍼 같은 젓가락이 주식회사에서 길들여진 내 유리혓바닥을
쓴다 너의 쓴 근심이 몇 방울이더냐
네가 뒤집어쓴 태산걱정이 몇 근이더냐
바람이 오리올스 내 모자를 수곡1) 대밭에
처박는다 그걸 주우러 꾀꼬리봉1) 하처를 헤맨다
고맙구나, 두 손 받쳐 고맙구나 거기에
입가심 냉수 한 그릇 담아내주는 새들의 지저귐
1)洗舌園 : 담양군 대덕면 용대리 555번지에 있는 별칭 '글을 낳는 집'. 문인들의 집필실.
1) 鹿死不擇音 : 사슴이 죽게 되었을 때 숨을 곳을 면밀히 가리지 않고 질주한다는 뜻. 즉 유사 시 결사항전 할 뜻을 내비친 말로 쓰임. 여기서 음音(소리)은 음蔭(그늘)의 뜻으로 쓰인 것, 즉 그늘진 곳 또는 숨을 곳.
2) 文學堤 : 담양군 대덕면 문학리에 있는 저수지.
3) 담양의 창평을 지나 대덕과 곡성의 옥과 사이에 화순리조트 방향으로 난 고개.
4) 담양군 대덕면 용대리의 자연마을로 청운과 용대 사이에 있음. 방아재 마을과 바쟁이 마을을 합쳐 수곡이라 부른다.
5) 담양군 대덕면과 곡성군 오산면 경계지점에 있는 수곡마을 뒤편 정상에 위치하는 산의 봉우리 이름.
계간 <주변인과시> 2011년 여름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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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시평』통권 45호 2011년 가을호
ㅡ2011년 발표시 중에서 김영찬이 발굴한 한우진 시인의 시(단평)
투석기에 장착한 언어감각, 미음(味音)을 캐다
김영찬(시인)
한우진은 기량이 큰 시인이다. 그는 곧잘 희금속을 찾아 헤매는 광산업자의 면모를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다양한 소재를 찾아 시를 쓰는 시인인 셈인데, 일단 그의 손에 걸린 광석은 제아무리 세공이 힘든 고강도의 원석이라 하더라도 정교한 귀금속으로 세공된다. 그렇지만 그의 시의 특징은 보기 드물게 남성적이며 대범한 편이다. 그런 그의 시편들 중에서 걸출한 근작시 <미음味音>은 비교적 섬세하게 다듬은 시로써 그의 와일드한 터치와는 다소 거리가 있긴 해도 여전히 광대무변, 호쾌하며 무대를 넓게 쓴 시이다. 예의 시를 완상하기 전에 그가 다른 지면(문학과 창작 2011년 여름호)에 쓴 평문 하나를 눈여겨 읽어둘 필요가 있다. 그가 김요일 시인의 근간시집 『애초의 당신』에 대한 서평인 《독주毒酒 혹은 독주獨奏》를 짚어보자. 거기 <감각은 이미지를 살해殺害 하는가> 라는 중간 단락에 이르러 그는 아마도 그 자신도 모르게 빠져 들어갔었을 성싶은 자신의 시세계에 대한 비의를 대단히 노골적이고도 과장되게 표출하고 있다.
음식은 모든 감각 그 자체이다. 시 또한 모든 감각의 총화가 아닌가 말이다. 묘사든, 진술이든, 이미지든, 그 어느 것이든 ―피에르 르베르디의 말에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고 해도 ―감각은 그것들에 집요하리만치 깊이 관여한다. “감각이 이미지를 완전히 인정할 수 있게 되면 감각은 정신 속에서 이미지를 죽이는 결과가 된다.”
―<감각은 이미지를 살해殺害 하는가>, 첫 문장(인용)
그의 얘기대로라면 모든 감각(미각뿐만 아니라 모든 오관의 감각)은 음식으로부터 온다. 즉 묘사든, 진술이든, 이미지든, 그 어느 것이든 모든 감각적 결과물은 시인이 섭취한 음식물로부터 비롯되는 바, 그러한 연유로 시는 모든 감각의 총화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다. 인용한 시는 시제(詩題)가 미음(微吟)이 아닌 <미음味音>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담양조찬潭陽朝餐’이라는 친절한 부제를 달고 시작한 이 시는 분위기의 흐름으로 보아 화자는 지금 그가 사랑하는 한 사람과 남도길 멀리까지 동행했다가 어떤 영문으로 사랑을 더 멀리 남쪽으로 떠나보내고 그 뒤에 홀로 호젓이 조촐한 아침밥상을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거기가 바로 담양(실제 지명인 담양 소쇄원이 있는 전라남도 담양군 潭陽이 아니라도 그렇다)이라는 그 이름조차 매우 미각적인 한 한적한 촌락의 외진 툇마루였던 모양이다.
시 <미음味音>의 첫 연(stanza)이자 마지막까지 하나의 연으로 마감되는 이 시의 기나긴 여로의 첫머리 문장은 맛으로부터 출발, 오관의 깊고 그윽한 감각을 따라 맛깔스러운 여정의 연속임에 다름 아니다. 그 이유를 간파하며 읽어나가자니 모든 사유가 미각으로 집중되는 찌릿찌릿함, 그 떨림이 매우 흥미롭다.
담양에 와서야 내 귀가 두 짝인 걸 비로소 알겠다
떡갈나무 마른 이파리가 부르르 떤다 : 쿠쿠밥솥의 압력추
산꿩이 날아오르며 목청을 뽑아재낀다 : 축이 기운 벤츄레이터
댓잎에 닿는 빗소리 점점 굵어진다 : 냉이국이 끓는 돌냄비
공장에서 나온 저것들이 입산하여
잎이며 물방울이며 새의 간결함을 닮아 같아졌구나
벼락이 친다, 대추나무 우듬지가 짜개진다 : 세설원 스카이라이프 접시
천둥소리에 놀라 내가 놓친, 식탁모서리를 들이받은 굴비접시나
천둥소리를 받아낸 안테나접시나 ; 허어 잠깐의 하늘인생
닮았구나, 들이받을 때가 더욱 서로 닮았구나
언제는 귀가 외짝이었던가. 그런데 담양에 와서야 내 귀가 두 짝인 걸 비로소 알겠다,는 얘기의 전초는 그 다음 문맥으로 건너가며 온전한 설득력을 갖는다. 즉, 떡갈나무 마른 이파리가 부르르 떤다는 사실이 사실은 압력밥솥의 압력추가 떠는 것과 상응하는 것이더라는 것이다. 음식냄새를 통한 그의 미각은 급기야 ‘산꿩이 날아오르며 목청을 뽑아재끼’는 현상으로 까지 비약, 댓잎에 닿는 빗소리조차 굵어지면서 그것은 바로 ‘냉이국이 끓는 돌냄비로 비화한다. 놀랍도록 비범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의 탁월한 상상력은 가일층 탄력을 받아‘공장에서 나온 저것들이 입산하여/잎이며 물방울이며 새의 간결함을 닮아 같아졌구나’의 경지에까지 닿는다. 그 벼락 치는 개안(開眼)에 다다르면 단단하기로 유명한 대추나무가 멈칫 그 우듬지를 짜개기에 이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세설원(洗舌園)의 스카이라이프 접시 위에 벌어진 사건이었던 것. 곧 미각을 끌어당기는 음식상을 일컬음이다. 그러므로 ‘천둥소리에 놀라 내가 놓친, 식탁모서리를 들이받은 굴비접시’이거나 ‘천둥소리를 받아낸 안테나접시’들 이런 것들은 그 참 부질없는 인생사를 빗대어 은유로 /끌어들인 것. 무척이나 허무한 것으로써 ‘허어 잠깐의 하늘인생’ 그것을 빼닮아 사랑도 후회도 패배와 실의마저도 하나의 접시가 깨지고 뒤집어지듯이 공허할 뿐이다. 돌이켜 보면 하고 많은 일상사가 서로 부딪혀‘들이받을 때와 그토록 서로 닮았구나’이렇게 허심해지며 닮았다는 사실 이외에 무엇이 그리 대단하겠는가.
음식에 빙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의 어법은 이처럼 배포 큰 장부답고 대담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 단순한 실상들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미음(微吟)을 거쳐 <미음味音>에 이르러 철학적 깊이를 더하려는 그의 미각적 성찰은 단지 혓바닥에 닿는 미각으로 자족하는 차원이 결코 아니다. 피에르 르베르디(Pierre Reverdy)의 말에 그가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이유를 가볍게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모든 감각은 그것(味音)들끼리 그것들(微吟적인 감각)에 집요하게 깊이 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감각이 이미지를 완전히 인정할 수 있게 되면 감각은 정신 속에서 이미지를 죽이는 결과가 된다.”라는 명제를 과연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다시 그(한우진 시인)가 쓴 평문 <감각은 이미지를 살해殺害 하는가>로 돌아가 그가 인용한 언술을 뒤따라가 보자.
오랫동안 시는 물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언어적 연상으로부터 피를 공급받아 지금에 이르렀다. “정신이 홀로 떨어져 있기 위하여 제아무리 세심한 주의를 한다 할지라도 외부 세계로부터 온 요소들에게서 자양분을 섭취하지 않을 수는 없다. 정신은 오로지 형체를 지니고 있으며 이름을 가진 형태들을 빌어서 제 이야기를 (그것이 아무리 내면적인 것이더라도) 할 수밖에 없다” (마르셀 레몽)
예의 글에서 그는 이제 마르셀 레이몽(Marcel Raymond)의 비평이론을 빌려와 그의 논리적 잣대로 삼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녹사불택음, 소리가 아니라 그늘蔭이구나
먹구름과 정면 대결하는 문학제의 낯짝에
덜꿩나무가 그늘을 던진다 수심이 깊어진다
수심 깊어 혼자 먹는 담양의 아침,
오랫동안 시는 물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언어적 연상으로부터 피를 공급받아 지금에 이르렀다, 는 논리에 초점을 맞춘 그의 논조는 위의 시구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녹사불택음’즉 소리가 실은 소리가 아니라 그늘(蔭)이라는 것에 맥이 닿는다.
그가 주석을 달아 자세히 밝힌 녹사불택음(鹿死不擇音)이란, 사슴이 마침내 죽음과 맞부딪쳤을 때의 상황을 설정한다. 사슴이 숨을 거둬 몸을 눕힐 장소를 미리 살펴 탐색함이 없이 죽음의 끝까지 무작정 질주하다가 만나는 장소가 음(音)으로 다가왔었으나 그 음(音)은 기실 음(音:소리)이 아니라 음(蔭:그늘)으로 승화된다는 뜻으로 의미의 고리를 풀었다. 말하자면 어떤 중차대한 사안에 부딪쳤을 때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다만 결연한 의지로 사건의 핵심을 돌파하다보면 종국에 이르러 타나토스적인 운명에 순응하게 되고 그 때, 음(音)은 곧 음(蔭)으로써 그늘이 된다는 사실에 방점이 찍힌다. 즉 감각의 지표인 미음(味音)의 맛이 혀를 차고 나가 마침내 미세한 미음(微音)의 세계를 통과하기라도 하듯 그늘져 음(蔭)이 된다는 것인데 그 때의 음(音)은 오관이 몸을 눕혀 편해지는 장소인 음(蔭), 그늘이 아니겠는가. 이제 그의 시는 다시 더 남쪽으로 내려간다. 거기는 화자의 개인사인 사랑과 고뇌가 불꽃 피어올라 음(音)이든 음(蔭)이든 구분이 안 되는 현실이다.
더 남행하고 있는 사람아
나는 보내지 않았는데, 눈물로 남쪽을 향해 간 사람아
내 눈썹 끝에 끌어올린 사랑 얼얼하다, 불붙는다
(중략)
고맙구나, 두 손 받쳐 고맙구나 거기에
입가심 냉수 한 그릇 담아내주는 새들의 지저귐
이렇게 다소 한탄하듯 영탄조로 시를 마감한다. 왜 아니겠는가. ‘입가심 냉수 한 그릇 담아내주는 새들의 지저귐(이것은 소리로 듣고 맛으로 포만감을 채워주는 제3의 음식이다)’ 없이 어떻게 현존에 의지한 감각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다시 그가 쓴 어법을 빌리자면, <시는 욕구이며 즐김의 대상이어야한다라는 현대적 견해는 경박하다고만 볼 수 없다. 타고난 감각과 체득된 감각이 만나면 그것이 곧 누구도 함부로 흉내 내지 못하는 맛, 절대의 맛 ―‘엄마의 손맛’같은―을 내게 되는 것이다.>라고 김요일의 시집 서평에서 그는 힘주어 미각적 효과에 의한 의식의 효용성이 어디에 닿는가에 대하여 열 올려 주장했던 것이다. 맛과 관련한 그의 시 한 편, 아침밥상 앞에서 이처럼 스케일 큰 시를 착상할 수 있는 시인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음식 얘기로만 맛을 낸 시가 아니기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한 것이다.
(참고) 시인 한우진은, 2005년 <시인세계>로 등단
그의 근간시집『까마귀의 껍질』이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계간 『시평』2011년 가을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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