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로스틱acrostic 기법에 의한
詩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
―김도언의 언어미학과 언어유희
김영찬(시인)
아,
김도언
아웅, 하고 우는 여자들의 식성,
아침부터 내리는 비,
아무래도 난 염소가 제일 좋아,
아무 깊이가 없다는 장점,
아일랜드 남자들의 평균 수명,
아직도 죽지 않은 옆집 개,
아니야, 이 문장은 틀렸어,
아지랑이와 우물과 무지개는 서로를 모른다,
아주 깊고 어두운 밤의 이론,
아예, 나를 항문 속에 구겨 넣지 그래,
아나크로니즘에 빠진 소설가의 고집,
아궁이 속 불꽃의 일관성,
아버지가 모르는 아들의 신경질,
아닌 것에 안심하고 아닌 것을 사모한다,
아기를 낳은 처녀의 종교,
아늑한 피로의 첨단,
아마도 날 사랑할 순 없을 거야,
아슬아슬한 이쪽 창문과 저쪽 창문의 거리,
아르헨티나 노인은 아무한테나 친절해,
아프고 연약한 책상과 침대들,
아가씨란 말은 쑥스러우니 빨간색으로 쓰자,
아낌없는 농담의 수위,
아담의 사과를 도려내라,
아쉬웠지, 내가 나를 모르는 동안,
아카시아가 팝콘처럼 터지네,
아까는 정말 미안했어요,
아멘,
계간 『시와 시』 2012년 겨울호 발표
시인은 언어의 마술사라고 하지 않는가. 시인이라는 연금술사는 언어라는 질료matière를 주물러 언어가 아닌 다른 형상을 만들어내는 마술의 힘을 보여준다. 그는 우선 오브제objet로써의 말을 고를 줄 알아야 한다. 조련사(調練師)가 되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도언에게 시란 무엇인가. 그에게 언어가 다가오면 그따위 말(言)이든 말(馬)은 어불성설 말이거나 말이 되지 않는다. 애당초 그는 말을 길들일 생각이 없었던 것일까. 그에게는 야성이 강한 말이 마음껏 야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놔두자는 의도가 엿보이는 바, 그 생각의 이면에는 야생마를 길들이지 않고 괴팍하게 날뛰도록 즉 말이 말을 쫒도록 방치하며 그것을 보고 즐기며 갖고 놀겠다는 두둑한 배짱이 있다.
아주 깊고 어두운 밤의 이론,
아예, 나를 항문 속에 구겨 넣지 그래,
아나크로니즘에 빠진 소설가의 고집,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 시대착오라니. 그가 차용한 시작법은 아나크로니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의 역발상이다. 현대는 Homo Ludens, 유희를 즐기는 인간의 시대라고 말하기에 아직 이른가. 아니다, 오늘날의 예술은 디지털 시대의 도래에 의해 전문적인 예술가들만이 예술을 전유하는 시대가 아니다. 일상인이 일상적으로 웃고 즐기며 창작활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고 감상하는 시대로 변모한 지 오래 되었다.
우리는 왜 바둑이나 퍼즐게임을 즐기는가, 아무 소득 없이 왜 축구나 윈드서핑을 즐기고 관람하는가. 흰 돌과 검은 돌이 잘 싸운다고 해서 생산적이지 않다. 프로바둑은 상금을 다투지만 일반인들은 돈에 관계없이 go game(바둑)으로 시간을 죽이며 생활을 살리고 여가를 즐기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대인의 ‘시간 죽이기의 비극’이 아니라 다른 측면의 예술가적 기질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즉 예술작품, 창작이라고 해서 거창하고 엄숙한 것만은 아니다. 멋진 시의 행간에 끼어든 청량한 아포리즘의 절구(絶句)는 절묘한 중거리 축구 슛 기술과 일맥상통한다. 예술이 언제까지 목에 힘 꽉 주고 진지해야 하는가. 일상인은 피로에 쩔고 시간에 쫓길 뿐이다. 그들 곁에 가까이 놀이로써의 예술이 기능한고 해서 해로울 이유가 없다.
*
김도언이 채택한 로골로지logology, 아크로스틱acrostic기법은 이미 오랜 시험을 거친 에너그램anagram의 일종이다. 일찍이 시인 조향(조섭제)이 1950년대에 선보인 바 있고 요즘의 젊은 시인들도 가끔 구사하는 서사법이다. 문제는 그가 날린 야구공이 펜스를 넘어간 홈런 볼의 통쾌함에 비견할 만큼 재밌다는 사실이다. 문장과 문장을 뛰어넘는 시행(詩行)은 특별한 연결고리 없이 독립적인 문맥으로 이어지지만 엉뚱하게 느껴지거나 억지스런 느낌이 없다. 그것은 소설가로서 다져진 그의 산문 실력이 시를 만나 누리는 자유의 탄성처럼 들린다. 시 「아,」는 그래서 아~, 라는 원초적인 모음으로 시동을 걸어, 초현실적이고도 부조리한 수사로 주행한다. 이 같은 언어놀이 방식은 일종의 퍼즐게임, 미로놀이이다. 시인은 일부러 미로를 만들고 스스로 미로에 갇히되 조급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가 구축한 미로는 흥미진진한 유희적 기능만을 추구하는 아포리아(aporia)의 행간이기 때문이다. 미로를 구성하는 문맥을 뛰어 넘을 때마다 우리는 또 다른 미로를 만나는 경이로움에 전율하게 된다.
그것은 그의 서사가 조금도 상투적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말이 말의 꼬리를 붙잡고 야성의 말갈기를 휘날리며 질주하는 언어유희(Jeux de mots)로 성공한 셈이다. 다의적인 상상력과 기발한 착상을 희석시킨 이 시는 현대인의 방황, 길 잃은, 미로에 든 도시인의 고독과 번민, 권태의 도정을 희화화하여 그것을 오락으로 즐길 수 있음을 제시 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차피 피해 갈 수 없는 일상의 피로와 권태라면 그 미로에 갇혀 헤매고 아우성치기보다는, 미로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까뮤의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다시금 현명한 해결책으로 부상하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현대인은 내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의 정체성을 따지고 규명하다가 결국은 리얼리티가 없는 사이버 공간 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한다. 그러나 동시대의 비극은 탈출구가 없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처한 상황이 원본 없는 가상공간의 혼돈이라면 원본을 찾던 손을 멈추고 오늘을 잡아라(Carpe Diem). 카르페 디엠 ‘오늘을 즐기라’는 명제야 말로 미로에서 출구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즐기는 방식으로써만 행복 추구가 가능하다는 추론이 성립한다.
언어의 진정성을 넘어 말과 생각의 모험을 시도하는 예술행위의 극단은 저급한 키치문화를 낳을 위험의 소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김도언이 차용한 두(頭)문자어 배열에 의한 아크로스틱 시작법은 근본을 무시한 말장난의 소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광역한 시의 로골로지logology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언어유희는 오히려 시의 에스프리를 폭 넓게 활용한 가작으로 봐야한다. 언어가 도달할 수 있는 세계 내의 가상공간, 일상에 Homo Ludens를 끌어드린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김영찬(시인)
[출처] 김영찬 副主幹의 詩와 아포리아【한 편의 시로 이룩한 아포리아】아크로스틱acrostic 기법에 의한 詩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김도언의 언어미학과 언어유희 - 김영찬(시인, 웹진 시인광장 副主幹)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2013년 1월호(2012, January) |작성자 웹진 시인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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