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눈 나리는 나라의 레오

바냔나무 2013. 1. 31. 23:21

눈 나리는 나라의 레오

 

 

눈 나리는 나라의 레오

 

                               김영찬

 

 

 

 

 레오를 생각하면 맑은 날씨에도 펑펑 눈이 내린다

 

 

 레오는 부자였다

앞이 트인 저택 말고도 사륜마차가 세 대 농노와 하인들을 부려

경작하는 장원은 넓고 연중 작황이 좋았다

까다로운 성품 못지않게 젊고 귀티 나는 그의 아내는 욕심이 과한 편은 아니었으나 퍼주기 좋아하는 레오의 씀씀이 때문에 자주

얼굴이 일그러졌다

 

 

 러시아의 겨울은 춥고 매정하다

한파가 몰아치면 보리죽도 못 먹은 걸인들이 담요 한 장 없이

페테르스부르크역 구내를 가득 메웠다

 

 

 레오가 다니는 길에는 그러나 언제나 눈이 내렸다

 

 

 얼어 죽을 번한 거지에게 장갑과 목도리 내복까지 벗어 줄 때는

모스크바 근교까지 침침하던 날씨가 순하게 풀려

함박눈 세상으로 환해졌다

 

 

 레오는 가난뱅이가 되었다

하인과 농노들이 소작농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대장원을 쪼갠 땅을 나눠주자 아내에게 쫓겨나 천애고아로 시베리아 침엽수림을 혼자 헤매다가 길을 잃었다 꼬박 사흘을 굶은 빈털터리 그가 눈 나리는 나라로 가기 위해 무임승차 기차를 기다리다가

선로로 발을 헛디뎌 죽던 날

 

 

한없이 무심하게 눈이 자꾸자꾸 내려 세상을 덮고 마침내

그의 시신마저 하얗게 덮어버렸다

 

 

레오 톨스토이, 그는 눈 나리는 나라에서 온 가난한 부자였다

 

 

 

*월간 시문학 하이퍼 시 2013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