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사월에 읽는 릴케의 시, 어느 봄날에선가 꿈에선가처럼

바냔나무 2011. 4. 9. 12:48

 

 

 

사랑이 어떻게 내게 왔을까, 어느 봄날에선가 꿈에선가/라이너 마리아 릴케

 

 

 


사랑이 어떻게 내게 왔을까
-라이너 마리아 릴케



어떤 모습으로 사랑이 내게 왔을까?
빛나는 해처럼, 설레는 꽃보라처럼 혹은
한 가닥 기도처럼 솟아났을까.

하나의 행복이 찬란히 빛나며
하늘에서 풀리어 나래를 접고
나의 꽃피는 마음에 앉았습니다.

*
들꽃이 가득히 만발한 날입니다
대낮의 장엄한 광휘 속에
저는 오히려 고독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에 당신이 제게로 와서
나의 손목을 잡으십니다.

나의 마음은 떨며 당신은 고요히 그리고 꿈꾸며
끝없이 저에게로 오십니다.
깊고 오묘한 밤에.

나는 너무나 두려웠지만 당신은 사랑스런 자태로
소리도 없이 내게로 와서
내 꿈속에 머물렀습니다.
저에게로 저에게로 흡사 동화 속 같은 밤이
나직이 울리었습니다.

 

 


어느 봄날에선가 꿈에선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어느 봄날에선가 꿈에선가,
언제였던가, 너를 만난 적이 있다
지금 이 가을날 우리는 함께 걷고 있다
그리고 너는 내 손을 잡고 흐느끼고 있다.
흘러가는 구름 때문에 우는가?
핏빛 붉은 나뭇잎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리 언제였던가, 한 번은
네가 행복했기 때문이리라.
어느 봄날에선가 꿈에선가.

*
먼 옛날ㅡ 먼 옛날의 일입니다.
언제였던가ㅡ 이젠 그것조차 말할 수 없는 옛날
종이 울리고 종달새가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가슴은 그리도 축복되이 고동쳤습니다.
하늘은 어린 나무 숲 위에서 그다지도 빛나고
말오줌나무는 꽃피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들이 옷차림을 한 가녀린 소녀,
휘둥그레 호기심이 가득한 그 눈
먼 옛날ㅡ 먼 옛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 릴케 시집 '꿈에 관(冠)을 씌우고'(1896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