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의 나라에서
김영찬
L은 나의 애인,
개나리꽃 꽃 핀 울타리 지날 때 또/박/또/박
보폭마다 봄이 묻어나는 소리
얘/얘/얘~ 얘^
모음으로만 목청 높여 불러내는 대신에
엘^엘^엘^ 엘르~
혓바닥 말아 올려 부르기 좋은 이름,
엘
그래서 그것만으로도 애인이 된 거라고?
엘, L을 소문자로 쓰면
l, 하지만
어쩐지 어색하다 싶어 손가락마디 뻣뻣해질 때
필기체로 바꿔주면 주르르 굴렁쇠 굴러가
내 입술 언저리가 정거장인 엘
감탕나무 숲 속의 바람소리 엘 엘엘, 엘
내 가슴의 빙벽에 부딪쳐 금속성 빛을 내는
엘
어느 집에서는 몹시 천대 받아
부서진 장난감에나 붙여졌던 이름
엘과 더불어
흰 구름 피어오르는 언덕을
산책하는 일은 즐겁다
구름은 엘의 젖가슴에 닿고 싶어서
낮게 몸을 구부렸었지
모르는 척 그 자릴 피해줬지만 나만 따라나서는 L
엘과 함께 강바람 쐬고 돌아와
책상 앞에 앉는다
엘이 웃는다
희미하게 웃는 엘의 미소 속에는
인생이 외롭다
강모래처럼 쓸려가 부질없다는 느낌
그렇지만 L의 일생 속으로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꺾여 들어간다
컴퓨터 자판을 함께 두드리게 된 엘, 엘과 함께
깨어있는 새벽마다 나는
시를 쓴다
아름다운 반려, 내 애인 자격을 갖춘 L,
컴퓨터를 지칭하는 거냐고?
천만 만만에~ 엘의 나라에 그런 복잡한 문명은 없다
엘의 몸에서 은은한 파동, 종소리가 묻어난다
L, 잠이 안 오니? 엘!
나와 함께 어디로든 영영, 아주 멀리 떠나고 싶다고?
잠깐만, 엘!
나는 서둘러 구두를 찾는다
구두밑창에 묻은 모든 발자국을 지워 없앤다
―엘이 기다린다
추신: 우주정거장 AR-라221 터미널에서 보낸 문자 메시지를 수신하신 분은, 양탄자보다도 작은 감탕나무숲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서녘바람에게 전달해 주시길.
L의 이웃들을 위한 최소한의 경고조치, 지침서로 띄운 그 내용 그대로를 부디 번안 없이 전달해주시길. 그런 즉, 여러분은 내 입천장 아래 임시 마련한 검역소에서 Immigration 수속을 마치게 되겠죠. 키워드 L, 패스워드 L999 +1을 친 다음 엔터키를 눌러 엘의 국경을 무난히 통과한 뒤론 다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겠죠. 휴양지 해안으로 떠나면서 나를, 내 애인 L을 알게 돼서 어쨌든 기뻤다는 표시로 쪽~ 손키스 ♡마크라도 날려 보내주지 않겠어요!
*나는 엘의 태생이나 엘의 속내에 대해서 사실은 아무 것도 모른다. 아는 바도 없지만 알려고 한 바도 없다. L은 언제나 j k와 m n 사이 내가 벙어리저금통에 가둔 동전 한 닢보다도 비좁은 공간에 꼭 낀 채로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인연 맺은 이후 우리들의 황금시대는 백두대간을 건너뛰어 알데바란 성단에 이르러서 모든 경계를 허물고 증폭된다. L, 엘은 눈발 성근 혹한에도 동토의 지축을 향해 곧은 뿌릴 내려 나에게 깊이 관여한다. 한 송이 연약한 냉이꽃 입술로 언제나 내게 속삭이고 싶어 하는 엘. L의 들녘엔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밤이 별도로 준비돼 있어 밤마다 눈이 내린다. 세상이 눈 속에 갇히고 엘의 발자국이 찍힌다.
*계간 《서정시학》 2009.3월 봄호
'나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대의 피아노와 당나귀 (0) | 2009.04.09 |
---|---|
벚나무 위 내 집 (0) | 2009.04.02 |
강아지 꾸꾸 (0) | 2009.01.31 |
투투섬에 안 간 이유 (0) | 2008.12.21 |
수상한 수사관행 (0) | 2008.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