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탐색, 하이퍼텍스트의 시인 이성렬
-시집, 『비밀요원』2007년9월 <서정시학> 간
김영찬(시인)
‘흑백영화에서 붉은 연기를 굴뚝 위로 피워 올린 최초의 감독이 누군지, 아느냐’고 묻는 시인 이성렬은, 이 시대의 우울한 탐미주의자로 외계의 사이버 공간에 불시착한 구도자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는 너무 고고한 정신적 방랑으로 인해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으나 이 시대를 함께 통과하기에는 어딘가 서투르고 버겁기 짝이 없는 이상주의자로 외로운 구도의 길을 걷는 선각자인가.
시집의 서두, <시인의 말>에서 그는 일갈한다.
‘안개꽃은 생겨나고자 열망했던 별들을/한 무더기 풀어놓았다/그 몸짓은 몹시 슬픈 것이라고 거울에게 고백하면 그만인 것을,’ 이라고. 침통한 어조인 이 독백은 자신만을 유일한 대화상대로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다. 글의 말미에 방백으로 한 마디 덧붙인 말, ‘이 책은(그의 이번 두 번째 시집) 대부분 사막에서 뿌려질 것이다’ 라고. 마침표도 없는 문장으로 말문을 닫았다.
그의 시집 전편을 관통하는 분위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울하며 초기 흑백영화 장면처럼 화면은 어둡고 명랑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하고 정중하게 신중한 어조로 타자에게 말 걸기를 끊임없이 시도한다. ‘지난 달 잡지코너에서 웃던/요절한 여배우는 아직 거기 있는지/별들이 태어나는 대로 금전등록기에 갇히는/쓸쓸한 성운에서 백색왜성들에게/화장법을 가르치는지’(「수요일 오후 2시, 시금치 더미 곁에서 웃네」중에서)
그는 도대체 어디를 헤매고 있는가. 그가 거처하는 세계는 어째서 그처럼 슬픔의 빛깔을 띠고 우울한가. ‘제비꽃, 하늘, 포도밭이 낯설어/잠언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고/그대의 짧은 노래를 베개 삼아/간신히 잠들 수 있었다고’ (「이곳에 남기 위하여」). 이처럼 그가 “이곳에 남기 위하여”라고 힘주어 고백하는 “이곳”이란 도대체 어느 혹성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시뮬레이션 상의 도상인가. 귀에 익혀두었을 법한 “그대의 짧은 노래”란 어떤 음표를 단 노래이며 어째서 그는 그 짧은 노래를 베개 삼아야 간신히 잠들 수 있다는 것인지.
벌새는 언제부터 곡선비행을 싫어했을까
해와 달은 날마다 조울증을 보이기로 결심했을까
무궤도전차가 푸른 스파크를 일으킬 때마다
성가대 트럼펫 주자는 반음씩 낮춰 연주했지, 그리고는
눈이 퉁퉁 부은 새들을 피해 지하병동을 통과하는 지름길로 귀가했네
*시,「그 모든 나날이 지나도록 나는 아직 미쳐있네」전반부에서
“곡선비행을 싫어”하는 벌새(조류 중에서 체구가 가장 작은 새로 알려진 벌새를 의도적으로 차용했을 법하다)란 다름 아닌 화자 자신일 터이다. 그리고 그가 곡선비행을 싫어하기 시작한 이유는 언제부턴가 해와 달이 날마다 조울증을 보이기로 결심했던 때부터 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푸른 스파이크를 일으키는 무궤도전차(아무데로나 달리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선로가 없는 전차)를 타고 일상을 벗어나 아마도 “그대의 짧은 노래”가 담긴 성가대의 노래를 들으러 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때 “성가대 트럼펫 주자”는 왜 반음씩 낮춰 연주하는지 그건 알 수 없는 일. 모를 수밖에 ”눈이 퉁퉁 부은 새들을 피해 지하병동을 통과하는 지름길로“ 서둘러 귀가해야 하는 화자의 개인사를 짐작해 내기란 해체적 독법으로도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너는 영문 크로스워드를 풀고 있었지, 빈 방에서 울며
<separate & unequal>이란 용어가 그리도 야속했던가, 교수는
『아웃소싱의 미래』라는 책을 오래 씹어보라고 했지
시집 표지에 얼굴을 박은 시인은 반드시 파시즘으로 가데
누구는 세포의 이면마다 화성과 금성의 음모가 보인다고 하던데, 아직도
침몰한 여객선 캡틴이 정복을 벗고 먼저 구명보트에 올랐다고 생각하는지
전쟁 대신 치르는 축구경기에서 누가 처진 스트라이커인가 면밀히 관찰하는지
흑백영화에서 붉은 연기를 굴뚝 위로 피워 올린 최초의 감독이 누군지, 이젠 아는지
지붕 위에 앉아 누군가 노래 부르네, 그대
아직도 날 모른다고, 그러나 진실로 미치게 하는 건
그토록 많은 나날, 너의 집으로 들어가는 그리운 골목과
나오는 아득한 골목이 같다는 걸 왜 몰랐을까?
*시,「그 모든 나날이 지나도록 나는 아직 미쳐있네」끝 부분에서
폴 사이먼의 노래, 「still crazy after all these years」에서 제목을 빌려왔다는 위 시의 종결은 결국 ‘그토록 많은 나날, 너의 집으로 들어가는 그리운 골목과/나오는 아득한 골목이 같다는 걸 왜 몰랐을까?’라고 자조 섞인 의문문으로 끝맺는다. 그렇다면 그가 속해있는 세계 내 우울이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그 이유를 짐작해내기란 그리 어려운 것만도 아니다. ‘빈 방에서 울며 <separate & unequal>이란 용어’가 섞인 ‘영문 크로스워드를 풀고 있’던 사람들이란 분명 화자인 그와 타자인 그들과 관계되는 그 누구로부터 <분리하다, 떼어놓다 separate>와 결부되는 <불평등한, 동등하지 않은 unequal> 끈끈한 인과관계에 놓인 사람들일 것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용어가 그리도 야속했던가’라고 묻는 교수는, ‘『아웃소싱의 미래』라는 책을 오래 씹어보라고 했다’는 것인데,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외부의 용역이나 시설을 이용하여 내 것으로 활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out- sourcing이란 용어는 물류, 유통에서나 쓰는 상업용어가 아니던가. 그런데 문제는 ‘시집 표지에 얼굴을 박은’ 채로 파시즘, 파시시트로 서서히 변해가고 있는 시인의 운명, 거기에 피할 수 없는 우울의 원인, 비극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성렬 시인, 그는 어떤 경로로 시인의 길을 걸어 시인이 되었으며 어떻게 시인임을 자처하게 되는가. 그의 시,「늦게 부른 노래」가 씌여지기까지 아니 그 이전부터 그는 어떤 태도, 어떤 자세로 시를 써왔는가. 그의 시,「유령」은 시에 대한 그의 마음가짐을 극명하게 잘 대변해주고 있어 보인다.
‘희망에 대해 말한 노인이 있었다. 바벨의 도서관을 조용히 거닐던 시인, 쉴 새 없이 눈알을 굴리는 시간을 꾸짖으며 서가 사이에서 썰물처럼 저물곤 했다. 밤과 낮을 소리로 분간하여, 책들이 침묵할 때에만 시를 썼다. (둘째 연 생략) 그는 끈질기게 기다렸다. 세상에서 가장 맑은 손가락이 책에 베이어 쓰라린 피를 쏟을 때까지, 시간의 눈꺼풀을 까뒤집으며. (셋째 연 생략) 처음으로 물에서 걸어 나온 발자국이 모래밭 위를 서성이는, 다른 행성을 향해 소년이 떠난 후, 시인은 글자들을 세상으로 모두 돌려보냈다. 사라지기 위하여 자연발화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을 뿐.’
위에 인용한「유령」이라는 제목의 시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모델 삼은 듯하다. 즉 그가 본받아야 할 시인이란 실명에 이를 지경으로 ‘밤과 낮을 소리로 분간하여, 책들이 침묵할 때에만 시를 쓰고’ 그 시를 세상으로 돌려보내는 시인의 태도를 귀감 삼았다. 참되고 존경스런 그 시인은, ‘책에 베이어 쓰라린 피를 쏟을 때까지, 시간의 눈꺼풀을 까뒤집으며’ 시를 썼으나 종국에 가서는 정작 그 ‘글자들을 세상으로 모두 돌려보냈다’. 시인이 쓰는, 써온 글자들이란 ‘사라지기 위하여 자연발화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와 뼈를 깎아 쓴다는, 썼다는 시인들의 글, 시에 대하여 그다지 집착하고 연연해하는 과업은 이성렬에게 그닥 중요한 중대사가 아니며 그렇게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늦깎이로 나온 시인, 늦은 나이로 이 혹성에 불시착한 이성렬 시인의 시,「늦게 부른 노래」는 그러므로 차라리 참회의 고백에 가깝다.
서른 살에 시인이 되었더라면
많은 여자들을 만났겠지
술집에서 못 일어나는 밤이 잦고
우체국 간판이 붉은 이유를 진작 알았겠지
가난한 하늘에서 떠돌이별은 마음에
좀더 가까이 항해했겠고
밤의 푸른 목소리에 반하여
자주 떠나버렸겠지
그러나 마찬가지였겠지
기억할만한 사랑은 오래 아픈 법
낡은 가방과의 이별도 나중에 오는 것
늦은 가을날 빛과 어둠 사이
비 내리는 바닷가에서
모든 길들을 지운 뒤
정강이에 와 닿는 매 시간과 헤어지며
모두 가엾은 죽은 살과 살아있는
껍질들을 쓰다듬고 있을 테니
*시,「늦게 부른 노래」전문
시집 전편을 읽다보면 가벼운 의문이 생긴다. 우선 제목만 살펴보아도 그의 시는 다양한 소재에 광대무변한 무대를 섭렵하고 있다. 그가 출현하는 공간은 무궤도열차를 타고 내린 수많은 정거장처럼 낯설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어떤 이유에서 시집 제목을『비밀요원』으로 정했을까. 그의 시혼은 조르쥬 쇠라가 그린 ‘그랑자드의 섬’을 기웃거리고 지붕들이 내려앉은「백야」에 가드레일을 타고 달리기도 하며, 동경의 하마마쓰 시장 골목에 들기도 한다.(뒤에 언급하겠지만 이 비밀요원의 비밀카메라는 도처에 장치되어있다. 그래서 그의 시가 하이퍼텍스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논평이 가능해지는 이유이다. 특수카메라의 visual화 된 탐색장치는 장소변환 없이도 어디서나 정보수집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장치는 시뮬레이션 효과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가 마침내 시선을 정착시키는 곳은 그를 낳아 기른 장소, 왕십리였다는 말인가. 왕십리에서 좌판식당을 하던 그의 조모(시,「동경초東京抄」)가 그리워 그 모습을 찾아 몰래 헤매던 행위가 결국은 그를 비밀요원의 특성을 닮게 만들었다는 해석은 과연 설득력이 있지 않는가.
‘낡아빠진 열쇠에게 불같이 화를 낸 적이 있었다 허리께가 구부정한 그 쇠붙이는 내 기나긴 고백과 깊은 외로움을 헤아리며 고분고분 열어 주었지’ (「사랑니에게」에서)
비밀요원의 임무치고는 눈길 안 닿는 데가 없다. ‘나 몰래 혼자 앓아도 되느냐’로 시작하는 이 시만 보더라도 이성렬은 철저한 비밀요원(심지어 ‘나 몰래’ 자신조차도 숨기고 수행해야 하는)임에는 틀림없으나 그가 자청하여 행하는 이 행위는 불편한 현실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사랑으로 아우르는 힘을 갖는다. 그래서 그의 시 전편에 흐르는 언어들은 외로움과 슬픔의 색채를 띠고 있으나 삶의 현장에 깊이 개입한 비밀요원의 눈길이 시들지 않고 생생하게 복제되는 하이퍼텍스트 형식으로 표출된다. hypertext형식의 표출이라니. 그의 시 한 편 한 편마다 줄기로 따라 나오는 다면경식 복합 이미지는 가히 알뿌리의 根莖(근경)을 이루는 리좀(rhizome)의 구조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를 읽다보면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자주 shift key를 눌러 재현(representation)한 비연속적인 거미집(web association)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달리 말하면 직선적 글쓰기(linear literacy)가 아닌 비선형구조(non linear structure)로 써내려간 그의 시는 국면변환이 잦고 장치변환이 빠른 virtual reality(가상현실)를 자주 도입한다. 그리하여 복합적인 이미지 축조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줄기 뿌리로 일관성 있게 연결시키는 노련함에 힘입어 그의 시는 혼란하기는커녕 높은 차원에서 한 차원 높게 통합되는 효과를 얻는 매력이 있다.
현대는 하이퍼텍스트의 시대다. 이성렬의 시가 근대성을 확보하는 근거는 동시대의 사이버 공간(cyber space, 電子腦 空間)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비밀요원의 역할을 현실성이 담보된 콘텍스트(context) 영역 안에서 충실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격월간『정신과 표현』2008년 6/7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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