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이용한 시집『안녕, 후두둑 씨』-김영찬 서평

바냔나무 2008. 7. 27. 21:55

 

이용한 시집『안녕, 후두둑 씨』-김영찬 서평 바냔나무 아래에서

2008/04/23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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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두둑 씨’와 <미래의 추억>을 위하여
-이용한 시집『안녕, 후두둑 씨』(실천문학사 刊)

 

 

                                                                            김영찬 (시인)

 

                                                    

 

*러시아 초기 형식주의자들의 시어란

일상어와 달리 자율적인 의미망을 갖는 것으로써

그것은 곧 순수한 음성, 혹은 글자로 축소된 기호나 다름없이

말하자면 의미를 거부하는 언어로

음성적인 유포닉(euphonic) 단어가 되거나

초이성적 담화를 지향하는

초의미어(zaum)를 추구하였다.

-Roman Jakobson

 

 

이용한의 시를 읽는 일은 매우 즐겁다. 기분이 상쾌해진다. 그의 시를 읽으면 읽을수록 입맛이 당기고 머릿속은 점점 텅 비어 진공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급기야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낯모르는 세상의 웃음보따리를 한바탕 쏟아내게 한다. 특별한 조건 없이 이미 읽었던 남의 시를 자발적으로 되풀이해서 읽게 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의 시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그 까닭은 그의 시는 이유 없이 즐겁고 재미나며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왜 재미있는가. 그의 시는 쉽고도 가벼우며 어처구니없기까지 하지만 아무 것도 보장하지 않은 언어들이 제멋대로 의미망을 벗어나 활달하게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이 상큼한 언어들은 읽는 이에게 한없는 참신성을 선물한다. 읽는 이에게 부담을 주기는커녕 늙은 교장선생님 훈시 같은 꼰대 목소리 대신에 청량감이 넘치는 이미지로 꽉 차 있는 시. 지시적 기의대신에 언어의 놀이마당으로 독자들을 불러내 한바탕 굿판을 벌이자는 시가 이용한의 진명목이다.

싱싱한 시어(詩語이자 時魚이기도 한)들이 제 때에 물 좋은 물길을 만나서 물길 툭툭 차오르며 뛰노는 양상으로 나타난 것이 이번 이용한의 시집이다. 즉 언어가 제 때 제 장소에 꼭 맞게 놓임으로써 그의 시어들은 최적의 조건을 갖춰 생기발랄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기를 얻은 시 한편 한편은 독자로 하여금 그 분위기 속으로 쉽게 뛰어들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해줌으로써 우리는 은연 중 그 시에 편승, 함께 원기 왕성해지는 바, 이 점이 이번 시집『안녕, 후두둑 씨』의 커다란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다리가 슬픈 당나귀 주인은

문 앞에 앉아 철썩철썩 꼬리를 흔든다

후두두 씨의 인생에는 불가피하게 긴수염고래가 등장

한다

수염을 바닥까지 늘어뜨린 이빨 없는 아저씨!

그에게는 치과보다 바다가 가깝고

발자국을 수집하며 여기까지 온 추억만이 간결하다

(하략)

 

-시,「후두두 씨와 긴수염고래」중에서

 

 

이용한에게 있어서 언어는 의미의 탈을 벗겨낸 소도구일 뿐이다. 시인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후두둑 씨를 등장 시킨 시인은 많은 말을 했으나 정작 아무 말도 하지 않았노라고 천연덕스럽게 엉뚱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그는 능청스럽게 뒷전에 물러나 있다. 우둔한 독자들은 이때 곤충 채집용 포충망을 들고 시 속에 뭐가 살고 있나, 큰 눈을 뜨고 달려들 것이다. 달려들어 서로 먼저 의미사냥에 나설 것이다. 그러나 보라, 위 시를 살펴보면 문장은 갖가지 어긋난 모순을 안고 독자의 사리판단을 모호하게 자극할 뿐이다. 단어는 단어끼리 이가 맞지 않는 불화의 위치에서 삐거덕거리고, 문맥은 문맥대로 도무지 동문서답, 딴전을 피우는 상태로 이상한 징후를 들어낸다. 그런데 그게 어때서, 라고 나는 이 시를 변호하고 싶다. 그래서 무슨 잘못된 심사로라도 뒤틀렸다는 말인가. 우리는 여기서 시적장치에 대하여 잠시 뒤를 돌아볼 필요를 느낀다.

 

 

〝나 여기서 나무나 할까? 이제부터 난 나무야! 넌?〞

〝난 지나가는 새야, 근데 넌 상한 나무야?〞

〝아니 그냥 이상한 나무야!〞

〝어쩐지 아까부터 이상하더라.〞

나무- 관세음보살!

〝눈 내린 숲에서 나는 희고 푸른 雪經을 읽는다

 

-시, 「나무아미-정선」중에서 부분

 

 

시인이 왜 시를 쓰는가, 독자는 왜 시를 읽는가. 첫째 쾌락을 위해서 라는 고답적인 답안을 준비해뒀다.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 쾌락(주이쌍스: jouissance)이야 말로 모든 예술 활동의 동기부여일 뿐만 아니라, 모든 행위의 동인이므로 대단히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시인이 시를 쓸 때, 그 자신이 매우 즐겁게 시를 쓴 경우(비록 비극적 주제로 시를 썼더라도) 비로소 그 시가 좋은 결과를 낳는다, 라고 말하겠다. 그렇게 써진 시는 독자에게도 큰 공감을 전달할 것이다.

둘째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는 ‘타협할 수 없는 현실과의 끊임없는 불화’ 때문에 이를 극복하는 방편으로 시를 쓰는 것이라고 강조할 수 있다. 즉 현실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불굴의 이상, 꿈을 향한 몸부림, 그것을 시라는 예술적 장치 안에서 구현해 낼 때 시인은 위로와 위안을 얻는다. 비록 현실은 어둡고 척박하며 도무지 될 법한 일이 한 가지도 없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환상임을 익히 알면서도 그러나 오히려, 저 <불가능한 것에 목표>를 두고 <현실을 향해 손사래 치는 정신>, 그것이 바로 불멸에 이르는 예술혼이며 예술가의 진정한 갈 길임을 자각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용한의 시집에 나타난 시들은 위 두 가지 명제, 즉 <정신적 쾌락(주이쌍스: jouissance)>의 의무와 <타협할 수 없는 현실과의 끊임없는 불화>에 대한 <불멸의 꿈>에 이르는 길에 어떤 방법론을 제시하며 어떤 자세로 어떻게 복무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후두두 씨에게 늦은 소포가 온다

나는 잘 있다고 포장된 외로운 책이다

갈피마다 부엌에서 침대까지 걸어간

발자국이 적혀있다

후두둑 씨는 되풀이 하고 싶지 않은

외투를 걸치고 식탁에 앉는다

(중략)

후두둑 씨에게 인생은 앉아있는 것이다

뒤꿈치가 닳아서 무표정한 의자가

매일같이 삐걱이는 후두둑 씨를 기다린다

(하략)

-시,「안녕, 후두둑 씨」중 일부

 

 

발상이 매우 재미있는 시이다. 제 아무리 시인이 새로운 언어로 시를 쓴다 해도 그것은 언어라는 기존 재질 내에서, 기존의 어휘력에서 창출해 낼 방법밖엔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런데 이용한은 ‘후두둑’이라는 의성어를 의인화하는 비범함으로 시작한다. 그런 한편 상투성을 벗어난 조금도 일상적이지 않은 문장들로 우리의 눈과 귀를 우선 긴장, 현혹시킨다. 바로 여기에 쾌락이라는 정신적 가치가 기쁨으로 독자들에게 전달되고 있다할 것이다. 또한 그가 시적 장치로 즐겨 사용하는, 소위 말 비틀기(데포르마숑: deformation, 변형)가 아주 유효적절하다. 그것은 ‘낯설게 하기’ 라는 해묵은 기법의 일환일 뿐이라고, 그런 방편이라면 1950년대에 시인 조향이 이미 선도하지 않았느냐고 힐난할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이 지루한 일상에서 빤한 사건, 뻔한 얘기를 빤한 구문으로 발화한다는 것은 고루하고 지겹다. 그런 의미에서 이용한의 재치 있는 왜곡, 활달한 모순어법(oxymoron)의 구사는 가히 천재적이라 할만하다. 더구나 그가 여러 시에서 구현하려는 세계는 우리가 이르고자 하는 이상향, 불멸에 이르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낯설거나 부당하게 느껴지지 않고 매우 천연덕스런 비유로 형상화 된다, 즉 그가 이룩하고자 하는 세계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있지 않았던’ 그러나 ‘있어야 할’, 아니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고 앞으로도 가능하지 않으나 그럼으로써 <시 속에서는 반드시 필연으로 완성될 세상>을 미리 노래하는 솜씨로 경지에 올라있다.

예를 들어 그의 시집에서, ‘낙타가 한 마리 초승달을 업고 간다/여기는 초원도 없고, 술집도 없으며, 당신도 없는/무미한 건조가 시간을 갉아먹는 사막의 누각이다’(시, 떠도는 물고기 여인숙 부분)를 대할 때 혹자는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상정할 수도 있으리라.

나는 이렇게 그가 이룩하고자 하는 세계가 <불멸>에 닿아있는 <불가능을 목표로 한> 지고한 것임을 가슴으로 통감하며 그의 시편을 다시 정독하는 것이다.

의미의 꼬리를 잘라내 버리고 무의미에 가까운, 초의미어(zaum)를 동원해 참신한 이미지만으로 시를 쓰자니, 허무한 미래파(1920년대 러시아 미래주의자 시인들과는 물론 구분된다)로 낙인 찍혀 구석으로 몰릴 공산이 크다. 그러나 캐캐 묵은 상징파 기법에 진부한 기의를 실어 의미의 우물을 파고드는 詩想은 참을 수 없이 지겹고 따분하다. 그러므로 시인의 목소리, 자신의 의표는 적당히 뒤로 숨기고 시 전면에 잔잔한 음률과 이미지를 앞세워 이렇게 자유로운 날개를 달고 독자에게 나타난 이용한의 시집, 『안녕, 후두둑 씨』는 매우 활달하지만 조심스럽게 우리의 가슴을 노크한다. 그의 시를 읽으면 추상적인 모습을 띤 세상의 아름다움, <미래의 추억>이 시집 면면에 하느작거리는 현상을 경험하게 될 거라고 나는 권유한다.

 

(끝)

 

*격월간 문예지, '정신과표현' 2006.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