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 저쪽으로 거세게 부는 바람
-김영찬 시집, 『불멸을 힐끗 쳐다보다』(2007.12)
최 라 영
김영찬의 『불멸을 힐끗 쳐다보다』는 불문과 출신의 문학지망생이었던 그가 남아공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의 직장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꿈을 놓치 않았던 오랜 연륜을 보여주는 특별한 처녀시집이다. 이 시집은 그러니까 그의 생에 있어서 특별했던 순간의 특별한 기록이다. 특별한 기록이란 말은 그가 시쓰기에 임하는 태도와 습관을 나타낸다.
즉 그의 시는 고통과 번뇌와 생활적인 것으로부터는 훨씬 혹은 약간 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편들을 통해서는 그의 생활사에 관한 것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미망을 건지기가 어렵다. 이 점이 독자가 그의 시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해는 시인이 자신의 사적인 영역이나 시를 감추는 방식을 지향해서가 결코 아님을, 책장을 넘기면서 곧 알게 된다.
이러한 방해는 시인이 시에 임하는 진지한 자세에서 기원하고 있다. 그의 시 한편 한편은 읽을 때마다 마치 매미의 날개나 나비의 얇고 큰 날개나 거미줄로 된 고운 휘장을 걷는 느낌을 준다. 이것은 시인이 그의 삶과 정신에 어떤 감춤의 막을 쳐서가 아니라 시를 창작하는 데에 있어서 지니는 미학적인 그의 태도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그는 삶의 고통 속에서 이를 위로하기 위해서 시를 쓰지 않는다. 그리고 세세한 일상사에 대한 상념으로 인해서 시를 쓰지 않는다. 혹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애증의 토로를 위해서 시를 쓰지 않는다. 그가 시를 쓰는 것은 그가 바쁜 일상에서 혹은 그가 40여개국의 나라를 오가며 무역업을 하던 인생의 길목에서 그가 느낀 아름다운 상념의 순간, 혹은 깨달음의 순간, 영감의 순간을 담아내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그의 시편에서 불순한 감정이나 불필요한 언어들을, 거미줄에 낀 먼지들을 조심스레 떨어내듯 떨구어 버린다(“쓰고 지우고 다시 쓴 글/ 높새바람에게 던져주고 남은 날숨을 구름옥상 위에/방치한다//까막까치가 날아와서 불순물 섞인 운문을/쪼아 먹으리”「쇠똥구리 아젠다」부분). 혹은 디오니소스적 감흥을 느끼는 격정적 순간의 기록이기 때문에 또렷한 이미지를 갖추고는 있으나 불필요한 디테일은 사라져 버리거나 허물어져 버리는 형국을 보여준다.
아마도 몇 년에 한 번씩 시집을 내는 시인의 경우라면 이러한 순간들의 기록으로 빼곡히 찬 이러한 시집을 낸다는 일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시적 영감 혹은 깊은 직관의 체험이란 우리의 인생에서 그리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평생에 거쳐서 그가 체험한 그러한 순간들을 ‘연필심에 침을 바르며’ 정성껏 포착하였고 마침내 그것을 한 권으로 묶어내었는데, 이런 측면에서 이 시집은 한 시인이 일생에 걸쳐서 체험한 영감의 순간들의 편린이라고 해도 적절하다.
달콤하고 돈독한 생은 아니지만// 이력서대로라면 나는 한국외국어대학(그놈의‘한국’자는 뺐으면 좋겠다고 재학생들은 투덜거렸었다) 불어불문(佛語佛文), 불어(不語)불문(不文)이라고 써도 되겠다, 학과가 아니고 그냥 외국어대(外國語大) 프랑스어과를 겨우겨우 졸업한 걸로 나온다.// 그런 탓에 밤이면 밤마다 나는 빠리의 한 뒷골목(빠리의 모든 골목은 뒷거래로 얽혀져있지만)을 뒤져 한 이름 모를 까페(정확한 발음은 ‘캬~훼’라야 맞다. 빠리장의 발음을 흉내 내자면 그렇다는 얘기지만) 바깥창가에 다리 꼬고 앉아 뇌살적(腦殺的)인 압쌍뜨 쑥향 대신 뤼싹 쌩떼밀리옹 a.o.c 라는 비교적 값나가는 포도주 한 병 시켜놓고 일생일대에 폼 한번 잡아보겠다는 것./ 밤늦은 까페 구석에 앉아 혼자 홀짝이는 포도주 일잔, 그것을 일생일대의 낭만으로 폼 한 번 잡아보겠다는 치기.// 빈티지 샤또에서 쫓겨나 포도주 병 속에 근생하는 성인(聖人) 쌩떼밀리옹(Saint Emillion) 옹(翁)을 불러내 대작을 권한다. 옹은 내게 삶이란 생과일만큼 과묵하면 되는 거라고./ 생과일 같은 생이라니?/ 빠리 제8구 몽소공원 안에 나뒹구는 복숭아씨라도 되란 말인가./ 단순히 말하지만 내 생은 내 손바닥 안의 성인을 아우르는 saint적인 삶이 아닌 내 인생 대강대강 숙성된 포도주 빛깔처럼, 보졸레 누보처럼 생짜배기로 사는 것. 내 스스로 나를 감독하며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나는 미장센 mise en scene을 모르고 미장생으로 산다. 모르는 건 모르는 것, 나는 영화제작자가 아니므로.// 미장생 mise en saint; 미장(美帳), 미장(美裝), 미장(美粧), 미장(美匠) 미쟁이의 미장술, 미장한 생./ 어떤 간판부터 손질해야 할까. 기왕이면 미장(美粧) 잘 한 나의 생(生), 미장생(美裝生)이 낫겠다. 잠깐, 잠깐만! 미(美)를 한 글자씩 독립시켜 장생(長生), 미 장생(美 長生)이라 써넣어도 될 법. 미장 생(美裝 生), 미 장생(美 長生)은 오늘 밤과 내일 밤의 내 모든 화두다. 밤을 새워 빠리 시내 뒷골목을 뺑뺑 나돌다보면 나의 생은 생과일주스만 못하고 연옥의 감로주처럼 뒷맛 떨떠름한 맛, 미장생!// 돈독한 생은 아니지만, 뤼싹 쌩떼밀리옹 포도주에 젖은 나의 생은 그런대로 붉다.
「불멸을 힐끗 쳐다보다 #11-2―미장생, 미장센(mise en saint)」
낙타는
길 떠나야 비로소 자유롭다
먼 길 떠나지 않는 동물, 그건
똥 잘 누는 놈일 뿐
다리 꺾고 앉아 지난 일 되새김하는 놈들 보면
버럭 화가 나서, 낙타야 가자!
네 푸른 안구에 비친 대추야자나무 숲이
물구나무 선 곡두의
허상이든 말든
로또 복권 쏟아져 세상이 비에 젖든 말든
낙타야, 길 떠나자
길에서
네 육봉은 사철 푸른 구릉
양떼들의 풀밭이 그 위에 있지
회오리바람에 눈알 쓰려도
모래 위로 길을 내며 걷고 또 걸어야지
―낙타야 가자!
「낙타」
위 시편들은 그의 시집 속에서 그 자신을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내거나 투영한, 드문 경우에 해당된다. 첫 번째 시에서는 장난스럽게 그의 삶에 대한 철학이 슬며시 내비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인생관에 관한 서술 방식이 다소 엉뚱하다.
왜냐하면 그가 전공한 불어불문과에서 프랑스 카페, 포도주, 그 포도주 병 속에 근생하는 성인(聖人) 쌩떼밀리옹(Saint Emillion), Saint에서 연상한 미장생 mise en saint과 미장센 mise en scene, 미장(美粧) 잘 한 나의 생(生), 미장생(美裝生), ‘뤼싹 쌩떼밀리옹 포도주에 젖은 나의 생’ 등이란 ‘연상작용’으로써 시의 구조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인의 詩作 방식을 알 수 있는데 그의 시의 전개는 언어와 관련한 자유연상작용에 의하여 흔히 그 얼개가 구성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러한 무의미한 듯한 자유연상을 통하여 명쾌하고도 투명한 그의 개성이 드러나며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가 지향하는 ‘생의 의미’쪽으로 시상의 흐름이 물흐르듯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위 시편에서도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삶이 ‘뤼싹 쌩떼밀리옹 포도주에 젖은 나의 생’이란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구체적으로 ‘미장생 mise en saint과 미장센 mise en scene’, 그리고 ‘미장생(美裝生)’에서 그의 삶의 철학이자 시의 지향이 드러난다. 즉 성聖스러운 것과 미美적인 것에 관한 지향과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직관적 장면’으로 체험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지향점은 그의 시 모티브에서 주요하게 나타나는데 그의 시는 세속적인 일상, 고통이나 번뇌의 토로 등에 관한 기색을 찾기가 어렵다. 그것은 시인이 시와 시적인 것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매우 신성시여기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그는 자신의 일상적이고 생활사적인 번뇌에서 철저히 괴로워하는 순간을 글로 쓰지 않고 견디고서 그것으로부터 초탈하는 순간 혹은 새로운 깨침의 순간을 겨냥하여 그것을 시적인 언어로 쓰고 있다. 그리고 시인은 그 어구 속에는 불순한 언어들, 세속적인 논리적 언어들을 집어넣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가 느낀 순수한 영감의 순간을 아름다운 한 풍경으로 승화시키고 싶어한다. 이것은 그의 시가 장식적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언어는 얼핏보아 장식적인 것 같으나 디오니소스적인 감흥의 기록과 같은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록에서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이어서 세세한 장면들이 사라지고 또렷한 한 가지 인상만이 명료해진다.
두 번째 시에서 ‘낙타’는 화자의 분신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런데 “회오리바람에 눈알 쓰려도 모래 위로 길을 내며 걷고 또 걸어야지”에서 여행길의 피로감이 살짝 스쳐지나갈 뿐이다. 오히려 길 떠나야 비로소 자유로운 낙타에게 길을 떠나자고 권유하는 화자의 모습 속에서 애써 피로감과 고독감을 극복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려는 시인의 모습이 겹친다. 그리하여 그는 먼 길 떠나지 않는 동물, 그건 똥 잘 누는 놈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적 화자의 생활인으로서의 단단한 치열함이 숨겨져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면모는 작품 속 건너편에서 살짝 비칠 뿐 시인은 그것으로부터 생산적 의욕과 의지를 끊임없이 키워나가는 것에 초점을 둔다. 시인의 시편에서는 ‘시간’과 관련한 것들도 많은데 그가 짧은 순간순간을 얼마나 쪼개고 치열하게 그러나 젊고 건강한 감각으로 살아오려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생활인으로서의 바쁜 타지생활과 지독한 향수를 그가 시적인 상상과 그것의 기록으로써 극복하곤 하였음을 알 수 있다(“역사상 가장 힘들게 고고한 자태로 버텨야 하는/ 나는/내가 나를 치료하는 방법으로// 연필심에 침을 바른다”,「쇠똥구리 아젠다」부분).
푼타아레나스 상공을 나는 철새들은/ 새 애인 만나러 안데스산맥을 단숨에 넘는 거라네/ 아니지, 그렇잖고/ 푼타아레나스의 철새들은 헌 애인 이별하러/ 팜파스 초원을 일부러 느릿느릿/ 억지로 종단하는 거라네// 사실은 그도 저도 단언하기 어려운 남 말하기 좋은 이야기/ 푼타아레나스의 철새들은 무거운 몸뚱이로/ 구름 속을 활강 하다가/ 구름 계곡에/ 그리움의 대부분을 쏟아버려 가뜬하게/ 세상 바깥으로// 푼타아레나스의 하늘과 들과 바다를 송두리째/ 모이주머니에 구겨 넣고/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쓰디쓴 각오로/ 용골돌기에 역린(逆鱗), 부러 어깃장 놓는 거라네
「푼타아레나스의 철새」
그러면 호두나무야
한 가지 대답만은 분명히 해두자
싹틀 힘 잃기 전에 말해야 하지 않겠니?
매일매일 호두나무에게 다가가 애걸하는 자들은
답을 못 얻어 배가 고프다
과격분자들은 그러나 부순다
넛 크래커nut cracker를 들고 망치로 내려치듯
호두알을 으스러트린다
철옹성인 두개골은 파편 날듯 박살나지만
파멸당하는 건
겉으로만 나타나는 견과류의 껍질
안전모 속 호두알은 아직도
건재하다
그러면 호두나무야
네 단단한 진실이 비밀에 싸여 오랜 시간
청과물 좌판대 위에 뒹군다 해도
죽음의 문턱까지
너는
침묵으로 딱딱하겠구나! 「끝장나서는 아니 될 오류」
앞서의 ‘낙타’와 함께 시인 김영찬의 시에서는 여행자와 유사한 이미지를 지닌 제재들이 주요하게 등장하곤 한다. 구체적으로 그가 체류했거나 여행했던 외국의 지명들도 자주 나타나며 위 첫 번째 시의 ‘푼타아레나스 상공을 나는 철새’또한 ‘여행자’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그의 ‘여행자’ 이미지는 ‘방랑자’이미지와는 구분되는데 그의 시에서는 어떤 방황의 흔적, 목적이나 목적지를 찾지 못한 자의 심리적 갈등은 보기가 어렵다.
그의 시에서 ‘여행’은 이미 정해진 것이어서-이것은 외국을 자주 오가고 생활해야했던 그의 직업상 특성과도 관련이 있을 듯한데- 여행지를 정하거나 그곳을 느긋하게 향유하는 측면보다는, 짧은 기간 그곳에서 체험한 감각과 느낌을 재빠르게 스케치한 풍경이 주요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타국여행이나 혹은 오랜 타국생활에서의 고독과 鄕愁는 이미 그의 체취가 되어서 그의 시편들에서 은은한 香水처럼 얇게 퍼져 나온다.
앞서의 ‘미장센’, ‘미장생’과 관련한 시편과 마찬가지로 그는 ‘동음이의어’에 착안한 자유연상적 구상을 보여주는 시편들이 특징적인 편이다. 이러한 구상의 경우 하나의 언어에 대해서 동시다발적으로 무의식적 편린들을 불러일으키는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詩作 구상방식은 그가 어떤 제재를 바라보는 것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된다.
위 첫 번째 시편에서 이러한 특성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즉 ‘푼타아레나스를 나는 철새’를 보면서 ‘새 애인을 만나러 가는 길’, ‘헌 애인과 이별하러 가는 길’, ‘푼타아레나스의 하늘과 들을 보면서 고독과 의지를 다지는 길’ 등을 연상한다. 즉 철새가 날아가는 ‘진행방향’과 그 ‘반대방향’ 그리고 ‘까마득한 창공’이란 양방향 혹은 다방향적인 상상을 보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시는 불어의 ‘Nonsens’에 가까운데 하나의 언어 혹은 대상에 대하여 양방향적인 사유와 무의식적인 상상이 동시에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양방향적인 사유로 인해 의미가 다각적으로 뻗어나가기 때문에 서로의 의미들이 모순되면서 그 어구 자체는 역설적인 무의미로 변하는 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하나의 언어, 대상에 대한 양방향적인 때로는 다방향적인 상상이 지속적인 가지치기를 통하여 기표의 얇은 놀이만으로 이어지게 결코 두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이러한 언어유희 혹은 사고유희로부터 훌쩍 뛰어넘고자 하는 순간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모를 두 번째 시편은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에서 ‘호두나무’와 ‘호두’는 독특한 이미지를 안고 있다.
그에게서 ‘호두나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가 고향의 청소년기에 문학청년으로서 꿈을 키우던 터전이 바로 ‘호두나무 아래’였기 때문이다(“한밭을 생각하면 언제나 호두나무가 생각난다. 나의 청소년기는 안개비 속에 서 있는 작고 푸른 호두나무 한 그루와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살던 대전시 문창동 좁은 길에는 위 졸작에 등장하는 호두나무가 실제로 서 있었다. 우리는 그 나무 그늘로 찾아가 숨바꼭질, 비석차기, 땅따먹기, 자치기를 하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그 꿈에 부풀던 시절 나는 문득 문학소년이 된다”, 「한밭에서 이루지 못한 한 문학청년의 꿈」부분, 『문학마당』(2002, 가을))
시인으로서의 꿈을 키우던 터전의 징표인 ‘호두나무’나 망치로 내려치듯 으스러뜨려도 속은 건재한 ‘호두알’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구체적으로 건재한 ‘호두알’이란 시인이 가치부여하는 본질적인 영역의 것이며 넛크래커로 망치질하듯 호두알을 부스러뜨리는 행위란, 시작방식 면에서 볼 때 그가 세속적인 논리망이나 고정적인 사유틀을 깨어버리려는 의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시가 태어나는 또하나의 방식을 보여준다. 즉 어떤 대상과 언어에 대한 양방향적이고 다각적인 사유와 상상 속에서 순수한 유희의 힘을 얻는 동시에, 세속적이고 관습화된 구조와 틀을 단숨에 뛰어넘어버리려는 초월적인 의지의 힘이 또한 작동하는 것이다. 그에게서 시적인 강렬한 직관이란 원시적인 직관이기도 한데 이것은 구순기적 언어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호두알’이란 이러한 지향을 지닌 시인의 뇌수의 일부인 것이다.
고양이를 죽여라, 저 음습한 밤의
모반
고양이를 죽인 자들은 고향을 음해한 자들일 뿐
그러므로
고양이의 눈동자 속에 파고 들어가
분노를 읽을 때
복수의 칼은 눈알 번득인다
나비의 눈을 보라
어둠의 중핵이 박힌 나비의 양 미간을 후벼 파
들어가 보라
눈동자와 눈동자가 맞부딪혀 소용돌이치는 곳에
야심한 밤이 흐르리
고양이는 그래서
고향을 할퀸 자들의 표적
그믐달 야위는 밤에만 암행, 자해를 일삼는다
슈퍼마켓 처녀는
고양이 눈을 흉내 낸 마스카라 화장술, 미간에
검은 숯덩이 묻힌 커다란 눈으로
계산대 앞의 나를 노려본다
밤의 가스파르
밤의 폭군이 검은 망토를 펄럭~
나는 재빨리 몸을 접는다
고양이가 섭정하다 놓친
밤
밤을 놓친 실향민들의 격정적인 불면
죽여라, 고양이!
이 깊은 밤의 상처를 혀로 핥는 고양이는
너무 많은 양의 고독을
두 눈의 백내장 안구에 축적했었구나
쏘아라, 고감도 반사광!
저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노리는 고양이
야~옹
「불멸(不滅)을 힐끗 쳐다보다 #11-4
—밤의 가스파르(La nuit de la gaspard)」 전문
앞에서 완전히 깨어져도 온전한 ‘호두알’이 시인이 중요시하는 본질적인 영역을 의미했다면, 망치로 두드려서 완전히 부서진 다음에도 건재한 무엇이란, 사고의 측면에서 볼 때 세속적인 논리, 그럴듯한 질서들을 단숨에 부수고 넘어서버리려는 직관적인 영역과 관련이 깊다.
이러한 시인의 뇌수와도 같은 ‘호두알’은 위 시에서는 밤 고양이의 ‘눈동자’로 변주되어 있다. 그리고 ‘건재한 호두알’이 지닌 특성이 좀더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위 시는 ‘밤의 폭군인 고양이’와 ‘그 고양이를 죽이는, 혹은 죽이려는 자’ 그리고 ‘나’가 등장한다. 이때 사람들에게 쫓기는 고양이의 눈동자 속에서 시인은 고향을 떠나온 자, 타국에서 깊은 밤의 상처를 혀로 핥는 자의 깊은 분노를 읽는다.
그리고 그 고양이의 눈동자는 동시에 화자의 눈동자로 전이된다. 고향을 떠난 타지 실향민들의 격정적인 불면과 너무 많은 양의 고독을 백내장 안구에 축적한 날카로운 눈초리란 동시에 시인이 가둬두었던 타지에서의 지독한 향수의 선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시인답게 그는 여기서 머무르지 않는다. “쏘아라, 고감도 반사광!”이라고 장난스럽게 외치는 것이며 그 눈 마주침 속에서 유아기적 의성어에 가까운 ‘야 옹’이라고 고양이처럼 외친다.
즉 시인은 밤에 쫓기는 고양이의 날카로운 분노 속에서 실향민의 깊은 고독감을 읽어내며 생명체 간에 상통하는 직관적인 것의 교감이 만들어낸 깊은 구멍을 통하여 ‘어떤 불멸을 힐끗 쳐다보’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의 언어들은 마치 어린아이가 인상적인 장면에 대해서 느끼는 발화와 같은 형식을 갖곤 한다. 가장 진정하고 솔직한 언어들은 비명이나 감탄사와 유사하게 흔히 직정적인 것이며 단순하면서도 모순된 것이다.
‘눈동자’과 관련한 모티브들은 그의 시편에서 비교적 빈번한 편인데 「철지난 고독」에서는 눈을 감고서 새로운 영혼의 문이 열리는 직관과 감동의 세계를 보여준다. 시인의 경우 그가 깊이 교감하고 영감을 느끼는 자리에 대하여 매우 예민하며 그것을 고양이와 같은 재빠름으로 놓치지 않는다.
그러한 곳에서 흔히 시인의 시간은 멈춰서 있으며 그가 선 장소는 흐릿해지고 그가 기대선 벽면들은 사라진다(“편도나무 꽃잎이 해일을 일으킨다//내가 기대어 선 한쪽 벽면이/지워진다” 「철지난 고독」부분). 또는 의식상에서 새처럼 날아가다 날개가 녹아버리는 완벽한 비상을 감행하기도 한다(“목표도 목적도 없이 날아가는 화살은/그러나/얼마나/자유로운 날개인가!//날아가다 날개가 녹아버리는 저 완벽한 비상”「촉 없이 날아가는」부분).
시인의 영감의 자리는 고흐의 예술작품 앞에서일 때도 있으며 김영태 시인의 시와 그의 죽음 앞에서일 때도 있다(“고흐,/그가 나에게 베풀어준 단 하나의 후의는/철지난 내 고독을/그의 취향에 맞는 색깔로 덧칠해도 좋다는 허락을/해준 것//편도나무 꽃잎이 내 이마에 떨어져 문신을 새긴다/나는 준데르트 평원 지평선 바깥에다/소실점 하나를 찍고 돌아온다//門이 활짝 열린다”「철지난 고독」부분, “그의 정처 없음을 어떻게 달랠까/조랑말 목의 방울소리 지나가듯 ‘얼룩’만 문지르다 떠난// 그를 풍경 속으로 사라진 풍경인이라 부르면 된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시선’이/첼로의 줄 하나로 그늘 반 근만큼만 아직도 떨고 있으니”, 「끝장난 얼룩같이-고 김영태 시인의 영전에 바친 시」부분).
무엇보다도 시인 김영찬에게서 시적 영감의 원천은 ‘강렬한 사랑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순간에 관한 스케치도 고양이처럼 날렵하면서 매미날개처럼 산뜻하면서 투명하게 형상화한다. 그는 이에 대해서 ‘무한대에 닿아 불멸에 스치는 순간’ 혹은 ‘조건없는 화상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분명한 것은 그는 ‘눈동자와 눈동자가 마주치는 곳’ 어디서나 ‘영겁에의 억류’를 체험하고 이를 재빠르게 스케치하는 타고난 시인이란 사실이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선 편서풍처럼
당신은 내게 꼭 한 번 담뱃불을 붙여준 적이 있다
일회용 라이터는 가스를 태웠고
루주 묻은 필터는 내 손가락에서 당신의 짙푸른 입술로
당연히 건너갔다
짜릿한 전율이 강 스파이크로
불꽃 튕겨 점화된 건 순간의 착각 때문이었을까
담배는 난해한 불씨를 안고
탁탁 끓는 용암 대신 긴 연기를 분출했으나
샴푸 냄새 풀풀한 머리칼은 그 때 제 맘대로 헝클어져
당신의 목을 휘감기에 좋았다
당신은 내게 꼭 한 번
담뱃불 뜨거운 불로 조건 없는 화상을 입혔다
「오해」
*『창작21』 200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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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라 영: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200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평론 등단.
저서,『김춘수 무의미시 연구』,『현대시동인의 시와 시세계』및
『한국현대시인론』등. 현재 서울대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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