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최 준(시인)의 서평

바냔나무 2008. 3. 24. 20:42

 최 준(시인)의 서평


 

  

 

 

두 시간 저쪽에서 날아온 철새들 아니, 구름들
― 김영찬 시집 『불멸을 힐끗 쳐다보다』


 

                                                 최 준 (시인)




  무게


 시가 아닌 시집에 관한 이야기이니 짝사랑하는 여자아이의 집 주변 서성이듯 빙빙 돌지 말고 바로 들어가자. 읽은 자의 특권으로 소감을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김영찬 시인의 첫 시집 『불멸을 힐끗 쳐다보다』는 개성적이다. 어느 시인이 쓴 시인들 개성적이지 않을까? 라는 흔한 반문 앞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말해야만 한다면, 그의 시의 개성적인 면모의 근간을 형성하는 요소이자 제일의 개성은 바로 가벼움이다. 얼마나 가벼운가 하면 시집에 실려 있는 그의 시 세 편만 무작위로 묶어 매달면 자기 몸무게보다 더 무겁기가 십상인 사람의 마음 하나쯤 건공중으로 부웅 띄워 올리기에 충분할 만한 그런 가벼움이다.
시집 속에서 그의 시들은 거만과 낭만을 반반씩 섞은 모양새로 두 손을 허리에 떠억 걸치고, 구름모자 하나 삐딱하게 쓰고 피레네 산맥 너머 저쪽을 기웃거리다가, 문득 생각난 듯 담배를 한 대 피우려고 라이터를 켜는 발화의 순간을 삶의 어떠한 순간보다도 더 짧게, 반짝, 펼쳐 보여준다. 날개와 다리와 바퀴를 다 가지고 있는 새이며 다족류인 그의 시들은 남미로 날아갔다가 아프리카로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와 지하철을 타려고 한밤중에 지하로 꼬물꼬물 혼자 내려가기도 하지만, 이 답답하고 어두운 정신의 현실인 지하에서 절대로! 오래 머물지 않는다. 어둠을 비롯해 지하는 무거운 자들(것들)의 세상인데, 그의 시들은 어디까지나 가벼움을 즐기고 사랑하므로.



 
언어


 이 시집 속의 언어들은 우리가 스스로를 곧잘 그 안에 유폐시키고는 답답해 하고 후회하는 일반적인 언어 의미의 철책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로 매우 탄력있게 생동한다. 좌판 위의 물고기나 푸줏간의 살덩이가 아니라 흐름을 숨쉬며 헤엄치고 초원을 질주하는 생물이다. 이러한 시어들이 모여 이루는 그의 시들 또한 당연히 좌충우돌이고, 어지러우리만치 부산스럽고 부지런하다. 장농 안에 반듯하게 개켜진 이불, 책장에서 오랜동안 존재이거나 풍경으로 꽂혀 있는 전집류처럼 삼박하게 정돈되지도 않았고, 정돈되지 않은 이 정서는 시에 관한 한 전통과 정돈을 애써 거부하려는 그 특유의 오기와 배짱 사이를 오락가락 한다.
시간이나 일정이 정해져 있는 정기 노선이 아니다. 마음 내키는대로 뛰어가고 날아가고 그러다가, 예기치 않은 순간 처음의 자리로 불쑥 되돌아오는 무계획이다. 충동이다. 이런 무계획과 충동이 더욱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 시들이 시인으로서의 그의 역량이나 의도에 의한 노력과 전혀 다르게 표현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독자에게 애써 다가서려고 다듬고 깎아서 '공통의 정서' 라는 엄격한, 그리고 일반적인 자기검열의 필터를 투과하는 게 아니라 '충동 그대로 드러냄'을 전략으로 삼고 있는 게 그의 시다.
그의 시집 속에서 숨쉬고 뛰어다니고 날아다니는 언어들은 저희들끼리 이마 부딪히고는, 너 많이 아파? 능청스럽게 물으며 마주보고 깔깔거린다. 혼절할 정도의 아픔이나 실제의 우리 삶처럼 절절하지 않고 너저분하지 않고 궁상스럽지 않다. 그의 언어들은 헬륨 가스를 한껏 들이마시고 건공중에 떠 있는 색색 애드벌룬이다. 자주 등장하는 상승 이미지의 하나인 날개나 날개의 주인인 새들은 속도와 비약을 추구하는 그에게 아주 중요한 요소다. 그가 부리는 언어들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부패의 시간을 기다리며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소용돌이치며 부딪히며 스스로 생동한다. 그는 자신의 (충동적이고 느닷없는) 마음이 가자는 대로 움직이고 싶어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시 속에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그런 마음으로 늘 설렌다. 그러한 그의 시의 언어들은 예외없이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고 있지 않으면 꽁무니에 엔진을 달았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의 시들은 좀처럼 땅 위로 내려서지 않는다. 땅은 지겹고 고통스럽고 징징거리는 울음소리들로 가득하므로, 무엇보다도 꿈꾸기가 어려우므로, 그의 시들은 언어라는 날개를 달고 대개 지상보다 높은 곳에서 존재한다. 그의 시들은 서정적인 언표들 대신 움직이고 날아다니는 동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눈 내린 풍경을 이슥하게 바라보고는 그걸 마음 속 서정과 적당히 섞어서 퍼내는 전통 가정식 비빔밥이 아니라, 살아서 내리고 있는 눈을 직관만으로 바라보려는 정직한 눈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눈이 내린다'고 쓰고 '창가에 아이스크림 왕국을 꽃피우기 위해 깊은 밤의 책상에 앉는다'고 쓴다. 그리고 덧붙인다. '눈이 온다 아이스크림 공장 공장장인 나는 잠을 설친다'고. 눈과 아이스크림 왕국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나. 시를 감동과 이해의 차원으로 국한시키려는 시의 현실주의자들과 시가 교훈이나 그럴듯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의 실용주의자들에게 그의 시는 난해하고 의미를 파악해 내기가 어렵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시는 써빙이 아니다. 식당 손님으로 들어가서 음식을 먹고 나오면 배가 부르지만, 서점의 책들은, 특히 시집은 읽다가 굶어 죽기 십상이다. 언어로 뱃속을 채우진 못한다. 그는 '팝콘나라'로 밀항하고 싶어한다.


 
화자


 그의 시들에 일인칭 화자가 많이 눈에 띄는 이유 또한 이런 이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그가 즐겨 사용하는 기법인 날음식 그대로인 그의 의식의 단면을 너무 그의 시의 주인공들에 국한시켜서 들여다보려는 게 아닐까 슬몃 걱정되기도 한다. 아주 소극적으로 말하더라도 최소한 그의 시들은 안주할 집을 마련하거나 마련하려고 하는 그런 애절한 노력보다 집을 이미 지어놓은 자의 여유와 배짱으로 채색되어 있다. 일인칭 화자는 하소연이나 자기 고백을 대신하려고 전면에 내세운 자가 아니라, 엄연히 그 자신이 시를 즐기며 가옥 한 채를 소유하고 있는 시 속의 어엿한 주인이다. 물론 그가 지어놓은 집은 독자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 그의 집은 세상 어느 구석에서 웅숭그리고 앉아 있는 실체로서의 집이 아니라, 시인이 그의 내부에 있는 화자를 시 속으로 퉁 튕기면서 슬쩍 명의를 이전해 준 자신만의 집이기 때문이다. 설계와 시공과 인테리어를 비롯한 마무리까지 물론 그가 혼자서 다 했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 지어놓은 집에 '또 다른 나'를 주인으로 앉혀 놓고 독자들을 초대하고 싶어한다.
아, 이 지점에서 잠시 되짚어 보고 가자. 그렇지만 그가 시집에 그려내고 있는 이 모든 풍경들은 성장의 시간이 무료해 견디지 못하는 친구 없는 외톨이 아이의 어설픈 신세 한탄도 아니고 시간이라는 항아리 속에서 너무 농익어 퀴퀴한 부패의 냄새마저 나는 어른 행색의 훈계는 더더욱 아니다. 그의 시들은 꿈꾸는 자, 날개를 단 자들만이 함께 날 수 있는 특유의 시간과 공간을 지니고 있다. 이건 지식이나 경험으로 판단하는 이해의 차원과도 엄연히 다르다. 화자들은 근본적이면서 궁극적이고 사실은 모든 이들의 희망이기도 한 놀이, 그 자체이고 그 결과물이 이 시집이다. 내가 아는 시인으로서의 그는 시를 쓰는 자신을 즐기고 자신의 시를 즐긴다. 그가 쓴 시의 화자들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자신들을 태어나게 한 그를 즐긴다.


고민


 그는 종종 밤을 새운다. 자신의 시로 타인을 고민하게 하지 않고 재미를 주기 위해서. 자신이 곧 시의 미식가이기도 한 그는 맛깔스런 퓨전 요리들을 독자에게 맛보이려고 무던히 애쓴다. 읽어보면 알 테지만 그의 요리의 재료는 물론 언어이고(때로는 부호이거나 기호이기도 하지만) 소스와 양념은 상상(몽상)이다. 언어에다 그 옹색하고 진부한 고유적이며 고정적인 의미 대신에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입히고 날개를 달아주고 (일부러) 유치하고 과장된 악세서리도 매달아 준다.
당연히 언어들은 그가 쓴 시들 속에서 시를, 의미를 초월해 달린다. 날아다닌다. 시를 쓰는 그에게 낭만이 없다면 아니, 좀 더 단적으로 말해 그의 시에 낭만이 없다면, 그는, 그의 시는 단지 숨쉬는 시체일 뿐이다. 그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는 중요하지가 않다. 아무튼 시인인 그가 쓰는 시 속에서 언어는 어린아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다. '의미 낳기'라는 가혹한 산통을 겪는 대신에 '의미 버리기'라는 역설적인 태도를 줄곧 견지한다. 그는 '놀이의 언어'로 시를 쓴다. 그는 놀이의 과정과 그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고, 놀이의 즐거움 그 자체에 심취한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놀이를 위한 도구다. 의미로서의 '시'라는 형틀마저도 그는 버린다. 애드벌룬이고 천사이고 악마이고 구름이고 철새이며 비유와 은유와 상상의 수많은 촉수를 가진 생물인 시를 어떻게 형틀에 가둘 수가 있다는 것인가. 이게 시인인 그가 지니고 있는 시에 대한 견해이자 언어에 대한 고민이다.
그의 시어들은 꿈꾸지 않으려고 살아온 날들을 마치 꿈처럼(꿈이었던 것처럼) 몽롱하고 아련하게 풀어놓고 있다. 어디로든 너희들끼리 마음대로 가라고. 그 결과가 종종 빚어내는 아이러니는 그의 시들이 가진 매력들 가운데 으뜸이다.


불멸


 자, 이제 '불멸'에 대해 얘기할 때가 되었다. 과학자들은 50억 년 이후의 태양을 우리는 볼 수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 기름이 고갈되고 지구 환경이 파괴되는 건 심각하지만 우리는 이걸 두고 아무도 걱정하지 않는다. 50억 년이라니. 대체 가늠이 가능하기나 한 시간대인가. 태양은 불멸에 가깝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자면 그게 아니다. 과학자들의 말대로라면 50억년 이후의 태양은 사라지고 없다. 그러므로 불멸은 '없다!' 이다.
그러면 시인 김영찬이 말하는 '불멸을 힐끗 쳐다'본다는 말은 거짓말인가. 그렇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거짓말이다. 그러나, 확신하건대 시인의 대답은 분명 '거짓말이 아닌 진실'일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나름대로 말하자면, 그는 바로 불멸을 '힐끗' 쳐다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힐끗' 속에서는 모든 게 불멸이며 영원성을 가지는 존재가 되는 게 아닌가. 그의 '힐끗 쳐다'봄은 곧 불멸을 획득하는 순간이므로 이토록 즐겁고 가벼울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그렇다. '힐끗'은 바로 그의 시를 감상하는 키워드다. 이 '힐끗' 속에 그의 시집이 다 들어 있다. 시집 속 그의 시들은 예외없이 이 '힐끗'의 결과물들이다. 옆에 놓은 그의 시집을 자꾸 힐끗거린다. 불멸을 엿본다.

*계간문예 다층 2008년 봄(창간 9주년 특집호)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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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준: 시인
1984년 『월간문학』 신인상,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개』,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