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의미를 살해함으로써 시가 살아나는 역설이 작동한다.

바냔나무 2012. 4. 2. 01:19

의미를 살해함으로써 시가 살아나는 역설이 작동한다.

 

          --<시의 위기는 금세기 사건이 아니다.>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이 글을 다시 읽게 되었다.

           정치/문화/예술 분야에 폭넓은 식견을 갖춘 분이 쓴 글을 읽는 기쁨이 있다.

          문인이라는 거창한 이름표를 달지 않은 분의 글이어서 더욱 소중하다.

          이처럼 깊은 호흡과 통찰력으로 다소 난삽한 졸시를 독해한 이 분께 깊은 경의를 표한다.

          시인이거나 문학평론가라고 거드름을 피우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 (김영찬)  

  


김영찬 시인으로부터 시집을 선물 받았다. 평소 시인을 코즈모폴리턴으로 여겼는데 시집 제목 역시 '투투섬에 안 간 이유'로 한국어 생활자의 세계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시집을 횡단하다보면 사소한 문법적 문제들을 망각하도록 언어를 구성하고 재배치 한다.


                          모든 문맥/모든 사물에 의미의 거머리가 붙어 다니는 게 지겹다.

                          김영찬 시집, <투투섬에 안 간 이유>  시인의 말 중에서

                        

   시의 위기는 금세기 사건이 아니다. 다만 형식에서 대중과 감성 교환이 품절이다. 날로 화려해 지는 영상매체와 비교하면 시는 형식에서 허약 체질로 바뀌었다. 은유를 푹 고아 먹어도 좀처럼 체질 개선은 어렵기만 하다. 세속은 악의도 품으면 이해를 빨리 하지만 선의는 질과 양에서 훨씬 오해를 받는다. 시라고도 할 수 있는 부처의 자비나 예수의 사랑이 선의만을 겨냥 했을 때는 반드시 실패한다. 악이 부재한 선은 반쪽이다. 그렇다고 선과 악을 잘라서 이등분 하면 더 많은 가치판단의 복제들이 일어나 혼란스럽다. 선이 악을 이기는 게 아니라 부재를 '가운데' 로 채워야 한다. 인간에게 악은 타인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 사이에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건 악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는 오래전부터 '가운데' 를 꿈꾸었다. 나눔. 공동체. 선물. 증여. 은혜. 중용...... 악의가 부족한 시는 괴사하기 마련이다. 

   김 시인이 문맥과 사물에 거머리처럼 의미를 빨아먹는 문법에 악의를 선물한다. 시집을 통해 악의를 읽어낸다는 건 소통을 의미한다. 시에서 악의가 문학적 효과를 나타내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젖꼭지에 딸기코를 대고 푸푸푸 문지르면

............액화성 발화

꽃등에 꽃이 핀다

......마침내 씨방이 여문다


 

보이는 것은.............안 보이는 것들의 후순위에

있고

태어나지 않은 것들이 그 뒤에

수정체 찌를 것이다

 

안 태어날 것들은

행위의 중간 중간에 웬만큼은 간여할 자격이 없다


 

귀두가 배꼽을 찾아가 성문 두드리면

기화성 폭발음,

굴뚝이 날아가고 지붕은 뚜껑 열어 방바닥은 그때

수만 갈래로 쪼개져 버린다


 

와중에 코끼리 코는 틀림없이 18m 길어진다

 

                      김영찬. -코끼리 코가 길어진다- 전문

 

 

 

   시에 대한 독해 위기는 문학의 위기로 이어지기 쉽다. 시인의 말마따나 거머리처럼 지겨운 의미는 박제이고 냉동이다. 지독히 꼬불꼬불한 코끼리 코인데......길이도 18m로 기네스북 감이다. 시에서 틀림없이 길어진다는 코끼리 코를 기네스북 감으로 독해한다는 게 시를 즐기는 건 물론 아니다. 문학 전통에서 코가 길어진다는 건 나무 인형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했을 때이다. 거짓말과 길어지는 코는 '악의' 적 상황이다. 코가 제자리로 돌아가려면 피노키오는 참말을 해야 한다. 이것 아니면 저것, 선과 악이라는 두 조건은 너무나 빡빡하다. '가운데' 가 없다. 이런 점 때문에 피노키오의 문학적 가치는 줄어든다. 문학이 옹호하는 감성적 가치가 늘어나고 줄어드는 코의 양극단 사이에 다시 씌어지는 게 바로 문학적 감성이다. 오로지 인간이 되겠다는 나무인형의 일념은 문학적 감성과 거리가 멀다.

   시장 권력이 금융 권력으로 바뀌고 국가는 상징적 질서에 의미를 계속 부여하면서 정밀한 관리를 하는 시대다. 김 시인은 문맥의 합리적 구성을 깨고 상징적 생물적 특징을 지운다. 독해를 혼란스럽게 하는 코의 배치는 의미에서는 손이다. 코끼리 코는 인간의 관점으로 오래전부터 손을 뜻한다. 시에서 코끼리 코에 필적할만한 코는 딸기코이다. 시를 여러 차례 읽어보면 시인은 '의미' 를 무장 해제 하고 읽는 과정에서 일체의 개입을 포기한다. 온전히 읽는 사람의 몫으로 시가 남는다. 의미를 살해함으로써 시가 살아나는 역설이 작동한다. 코끼리 코가 줄어들면 이 시는 악의를 접음으로써 문학적 실패를 겪는다. 액화와 기화의 수사적 대결 사이에서.


의도적인 오역

                                김영찬

  


오독은 오독오독~ 사탕 깨물던 습관이 만든 의성

어의

   반쪽

'사탕'을 '사랑'으로 알고

알사탕 입에 넣고 달콤한 단맛의 해갈은

즐거워라

 

 

추파춥스 긴 막대기에 끈적거리던 손

알사탕을 빨고 핥고 진저리치던 호시절이 흘렀죠

이제는 아무도 사랑을 사탕을 시령 위에 드높이 선

반 위에 번쩍

들어 올려놓지 않는군요

사춘기라는 춘궁春窮한 사사분기가  

수백 번 흘러갔죠

나는 요즘 '연애'를 '여애'로 ㄴ을 접어놨습니다

'사탕'을 '사탄'으로 오역하는 버릇까지

생겼습니다

의도했던 바,

'어느 날 익명을 요구하는 사람에게서 편지 한 통

받았다' 를

 

'어느 날 악명 높은 사탄에게서 펀치 한 방 먹었

다' 로

의역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알사탕 입에 물고 새록새록 혀를 달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죠

그 무렵엔 추파춥스 막대사탕을 깨물어 짝사랑이

조각나도

추저분한 추문이란

바닥바닥 밑 빠진 사탄의 바다 어디에도

추파 번지지 않았습니다


 

   이 시에서 가장 뛰어난 문제점은 오독이나 오역이 문제가 없다는 문학적 결론이다. 예를 들어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의 헛소리를 모은 갖가지 어록들과 비교하면 김 시인이 쓴 시는 차라리 문맥에 충실하다. 시의 위기는 사실 오독의 위기다. 오독은 '오독오독~'  깨물어 먹어야 맛인 데 어느덧 교육이 습관으로 자리잡으면서 의성어는 아득한 주변으로 밀려난다. 시인은 주변으로 밀려난 의성어들을 적대 혹은 악한 문법 파괴 방식으로 부른다. 파괴 뒤에 새롭게 문학적 감수성을 피워내고 싶기 때문이다.    

   남한에서 문학은 역사적 사건들보다는 보편적 연애 가치나 식구들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다. 묵독이 정착 하면서 시를 읽는 건 귀에서 눈으로 역전이 일어나며 내면화가 가속 되었다. 문학이 사회적 관심사들로부터 개인을 떼어놓고 자기 위안을 삼을 때 감수성은 불치병을 얻는다. 살면서 해결할 수 없는 온갖 불화는 대개 오독이나 오역으로 귀결한다. 소통부재의 현실에서. 추파춥스 막대사탕을 깨물어 먹는 동안은 달콤한 소통의 침묵이 온다.

   고도의 추상성을 즐기기 어려운 사회는 정신적으로 궁핍하다. 추상은 정신의 풍요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비극을 추파춥스로 표현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추파춥스가 문학의 가능성을 구현하는 방식을 배제하는 읽기 뒤에는 시에 대한 편협한 이해가 자리한다. 언어를 조탁 하고 아름다운 표현을 찾고...... 시집에는 애완견 꾸꾸가 나오고 두루뭉실빵꾸땜질이라는 543호 성좌가 등장하고 당나귀들이 피아노 건반 위를 걸어간다. 시집을 관통하는 말장난에 가까운 표현들만 모아도 문학이란 문법에 맞는 언어들을 배치하는 게 아닌 의성어나 의태어로도 가능하다는 걸 발견한다.

   김영찬 시인의 시들은 대중에게는 폐쇄적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늘고 바쁘지만 힘든 삶이 한국인들에게 모든 걸 밀어내고 생존 의지만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http://www.mediamob.co.kr/moonta 미디어몹 랜덤블로그, 백반님의 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