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지 아일랜드에서 감자껍질 요리하기
김영찬
나 이짜나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에 일단
가입해야 겠어
늙은 작가의 원작소설*을 그녀의 조카가 엮은,
한국의 김안나가 옮긴
이 책 말인데, 매직하우스에 잘 보관돼 있다 거든!
제책(製冊) 496쪽에 1만2천800원을 몽땅
투자하겠어
통행료를 내고 버젓이 건지 아일랜드의 책갈피에 머릴 처박으면
잘 구운 돼지삼겹살이 생감자껍질 파이에 곁들여
목구멍은 호사(豪奢)하겠지
제2차 세계대전이 안 끝난 섬을 점령 중인
제국주의군대가 밀어닥치겠지
그네들은 살코기를 빼앗고 씨감자의 싹눈을 짓이길 거야
군인들은 곧 감자 독(毒)에 걸려 후방병원으로 급송되겠지
두고 보라고 그렇게 될 게 틀림없지
두고 보라니깐,
점령군이 아니더라도 독성이 강한 씨감자의 맹아(萌芽)와
돼지 꼬리를 함부로 다룬 축들은
너 나 없이
통행금지(通行禁止)에 발목 묶이게 될 거라고!
감자 껍질파이요리를 무난히 소화해낸 사람들만 남아
독서클럽회원으로 <푸른 지느러미 섬>**에 대한 길고도 진부한
독후감을 쓰거나
난상 토론을 벌이는 일 따윈 하지 않겠지
독서애호가도 아닌 내가 왜 하필 이 클럽 멤버가 되려고 기를 쓰는지
왜 그러느냐고 지금 따져 묻는 거야?
혁명은 물 건너갔고
전쟁의 포화가 모양만 바꾼, 또 다른 섬을 만들어 그 짓을
되풀이 하는 이 세상천지에
아리따운 휴머니즘, 인간성?
난삽한 수사(修辭)는 그렇다 치고 따뜻한 손으로
따뜻하게 구운
따뜻한 파이 냄새가 섬을 감싸고돈다면 구태여
생면부지의 오지(汚池)나 오지(奧地)의 도서목록을 뒤져
별천지 대륙을
탐문/탐색, 잠행하고 다닐 이유가
뭐 있어, 안 그래?
나 아무튼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에 무조건
가입하고 봐야겠어
천천히 섬을 둘러본 다음 천천히 졸문(拙文)에
방점을 찍어도
늦을 게 뭐 있을 라고
종결어미가 시원찮은 섬들은 제 풀에 죽거나
대양의 외각을 떠돌다가 본래의 섬으로 원대복귀 하든 말든
그런 거야 세계사의 뒷장에 기록될
이유도 없겠지
(주)
*원제: <The Guernsey Literary and Potato Peel Pie Society>에서 차용.
메리 앤 셰퍼(Mary Ann Shaffer) 지음, 애니 배로우즈(Annie Barrows) 편집.
번역 김안나, 도서출판 『매직하우스』 출간.
**한 때(아니 지금까지도) 김영찬이 설계, 거류하려던 섬 이름.
-격월간 문예지 <유심> 2010년 9/10월호에 발표
[출처] 건지 아일랜드에서 감자껍질 요리하기 |작성자 바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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