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건지 아일랜드에서 감자껍질 요리하기

바냔나무 2010. 9. 20. 18:29

 

 

 

건지 아일랜드에서 감자껍질 요리하기


                                                                   김영찬





나 이짜나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에 일단

가입해야 겠어

늙은 작가의 원작소설*을 그녀의 조카가 엮은,

한국의 김안나가 옮긴

이 책 말인데, 매직하우스에 잘 보관돼 있다 거든!

제책(製冊) 496쪽에 1만2천800원을 몽땅

투자하겠어


통행료를 내고 버젓이 건지 아일랜드의 책갈피에 머릴 처박으면

잘 구운 돼지삼겹살이 생감자껍질 파이에 곁들여

목구멍은 호사(豪奢)하겠지

제2차 세계대전이 안 끝난 섬을 점령 중인

제국주의군대가 밀어닥치겠지

그네들은 살코기를 빼앗고 씨감자의 싹눈을 짓이길 거야

군인들은 곧 감자 독(毒)에 걸려 후방병원으로 급송되겠지

두고 보라고 그렇게 될 게 틀림없지

두고 보라니깐,

점령군이 아니더라도 독성이 강한 씨감자의 맹아(萌芽)와

돼지 꼬리를 함부로 다룬 축들은

너 나 없이

통행금지(通行禁止)에 발목 묶이게 될 거라고!


감자 껍질파이요리를 무난히 소화해낸 사람들만 남아

독서클럽회원으로 <푸른 지느러미 섬>**에 대한 길고도 진부한

독후감을 쓰거나

난상 토론을 벌이는 일 따윈 하지 않겠지

독서애호가도 아닌 내가 왜 하필 이 클럽 멤버가 되려고 기를 쓰는지

왜 그러느냐고 지금 따져 묻는 거야?

혁명은 물 건너갔고

전쟁의 포화가 모양만 바꾼, 또 다른 섬을 만들어 그 짓을

되풀이 하는 이 세상천지에

아리따운 휴머니즘, 인간성?

난삽한 수사(修辭)는 그렇다 치고 따뜻한 손으로

따뜻하게 구운

따뜻한 파이 냄새가 섬을 감싸고돈다면 구태여

생면부지의 오지(汚池)나 오지(奧地)의 도서목록을 뒤져

별천지 대륙을

탐문/탐색, 잠행하고 다닐 이유가

뭐 있어, 안 그래?


나 아무튼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에 무조건

가입하고 봐야겠어

천천히 섬을 둘러본 다음 천천히 졸문(拙文)에

방점을 찍어도 

늦을 게 뭐 있을 라고

종결어미가 시원찮은 섬들은 제 풀에 죽거나

대양의 외각을 떠돌다가 본래의 섬으로 원대복귀 하든 말든

그런 거야 세계사의 뒷장에 기록될

이유도 없겠지

 

 


(주)

*원제: <The Guernsey Literary and Potato Peel Pie Society>에서 차용.

 메리 앤 셰퍼(Mary Ann Shaffer) 지음, 애니 배로우즈(Annie Barrows) 편집.

 번역 김안나, 도서출판 『매직하우스』 출간.


**한 때(아니 지금까지도) 김영찬이 설계, 거류하려던 섬 이름.



-격월간 문예지 <유심> 2010년 9/10월호에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