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그래피 미래에의 확장
김영찬
1.
마적단의 소녀는 어디로 갔나, 마적들의 소굴에서
마적들의 성모로 태어났나, 그랬나
그렇게 둔갑했나?
그렇게 방치,
방심할 수 있는 자유가 언제부터 허락되었나
2.
불칼과 볼펜의 동질적인 춤, 하나는 불을 뿜고
하나는 볼멘 목소리로 응대한다
3.
던킨 도넛에 휘날리는 계피가루
꽃병은 엎어져 난데없는 물이 와디를 적시고 흥건히 흐르는데
병 속에서 탈출한 꽃들은 난세의 춤을 춘다
마조키스트와 사디스트의 절묘한
만남이라고?
여보시게, 일필휘지 캘리그래피는 자유를 찾아
날개를 펼쳐보일 뿐
이런 식의 시시껄렁 시답지 않은 주말오후란 한가롭긴 한데
어쭙잖은 게 아니냐고
제발 생트집 좀 잡지 말아주게
4.
낮달은 탱자나무 가시에 눈 찔려 이래저래 창백해진다
대추나무만 봐도 겁에 질려 detour 원행,
길을 피해간다네
5.
그대(그대가 누군데?)와 나(나는 누군데?)는 일급 방랑자,
어디를 둘러봐도 먼저 누울 곳이 없다
없고, 그래서 엉덩이 앉힐 자리가 상기도 딱딱해지면
그 다음 행선지로 서둘러 떠나야 하지
그렇다네, 사소한 머리카락 하나에도 인생을 후회하는 버릇이 생겼지
그건 우리들의 선택이 아니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결코
세투발에 간 게
아니고
과달키비르 강을 보러 세비야에 간 것도 아닌 셈이네
세투발이 나한테로 걸어오고
세비야가 나를 내방한 것도 물론 아니지만
그렇지만 나는
과달키비르 강에 부르튼 발을 세족하네
발 닦은 물은 나로부터 멀리 떠나 사라진 세 번째 발가락을
상상하네
6.
흘려버린 왼쪽, 잘려나간 나의 새끼발가락 몇 개는
태양의 음지로 몸을 낮췄지
자세를 낮춘 채
어느 혹성의 모서리에 숨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네
그러므로 나는 한 획 긋는다
이것이 시가 아니라서 시답지 않다고 냉대한다면
내 붓은 오독을 이기지 못하고 켄타우로스의 별자리마저
놓친 거라고
*월간 <현대시> 2010년 5월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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