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캘리그래피 미래에의 확장/김영찬

바냔나무 2010. 6. 7. 02:34

 

 

캘리그래피 미래에의 확장


                                                                김영찬




1.

마적단의 소녀는 어디로 갔나, 마적들의 소굴에서

마적들의 성모로 태어났나, 그랬나

그렇게 둔갑했나?

그렇게 방치,

방심할 수 있는 자유가 언제부터 허락되었나


2.

불칼과 볼펜의 동질적인 춤, 하나는 불을 뿜고

하나는 볼멘 목소리로 응대한다


3.

던킨 도넛에 휘날리는 계피가루


꽃병은 엎어져 난데없는 물이 와디를 적시고 흥건히 흐르는데

병 속에서 탈출한 꽃들은 난세의 춤을 춘다

마조키스트와 사디스트의 절묘한

만남이라고? 

여보시게, 일필휘지 캘리그래피는 자유를 찾아

날개를 펼쳐보일 뿐

이런 식의 시시껄렁 시답지 않은 주말오후란 한가롭긴 한데

어쭙잖은 게 아니냐고

제발 생트집 좀 잡지 말아주게


4.

낮달은 탱자나무 가시에 눈 찔려 이래저래 창백해진다

대추나무만 봐도 겁에 질려 detour 원행,

길을 피해간다네


5.

그대(그대가 누군데?)와 나(나는 누군데?)는 일급 방랑자,

어디를 둘러봐도 먼저 누울 곳이 없다

없고, 그래서 엉덩이 앉힐 자리가 상기도 딱딱해지면

그 다음 행선지로 서둘러 떠나야 하지

그렇다네, 사소한 머리카락 하나에도 인생을 후회하는 버릇이 생겼지

그건 우리들의 선택이 아니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결코

세투발에 간 게  

아니고 

과달키비르 강을 보러 세비야에 간 것도 아닌 셈이네


세투발이 나한테로 걸어오고

세비야가 나를 내방한 것도 물론 아니지만

그렇지만 나는

과달키비르 강에 부르튼 발을 세족하네

발 닦은 물은 나로부터 멀리 떠나 사라진 세 번째 발가락을

상상하네


6.

흘려버린 왼쪽, 잘려나간 나의 새끼발가락 몇 개는

태양의 음지로 몸을 낮췄지

자세를 낮춘 채

어느 혹성의 모서리에 숨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네


그러므로 나는 한 획 긋는다

이것이 시가 아니라서 시답지 않다고 냉대한다면

내 붓은 오독을 이기지 못하고 켄타우로스의 별자리마저

놓친 거라고


 

*월간 <현대시> 2010년 5월호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