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끈적거리는 밤하늘 외 4편
김영찬
청주와 충주, 공주 사이에 떠돌이 별 ●이 떠돈다
중량이 무거운 별 ●을 필묵(筆墨)처럼 그대로
무겁게 놔두면
먹물 번진 도시의 밤은 언제나
묵묵부답, 과묵하다
과묵한 것들은 속이 편하다
청주와 충주, 공주를 오가는 구름이
가슴앓이 도지는 이유는
안대로 가린 내 눈이 조치원쯤에 새를 날려 보내고
미련 없이 오던 길 되돌아가기
……때문
눈을 감은 나는 세 도시의 바람소릴 정확하게
구획한다
바람의 몸통과 꼬리, 갈비뼈의 수효를 정확하게 계산해서
탑을 쌓은 뒤 높고 붉은 탑신을
조치원으로 옮긴다
조치원은 새들이 날아와
날개 터는 곳
당신은 이들 도시명 따위와 홰를 치는 새들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들어 본 적도 가본 적도 없으므로
어떤 인연도 맺지 않는다
방향을 잘못 잡은 구름떼가 끼어들어 ● 속에
행정도시의 깃발을 꽂을 뿐
청주와 충주, 공주 사이에 눈꺼풀 상한 쭉정이
별 ○들이 드디어 개입한다
새로 생긴 ○들의 중력 없는 잠행들
스크린에는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이 즐비하게 줄을 서고
청주 →충주 →공주를 이어주는 교각은
쉴 새 없이 무너진다
쉰 목소리로 이빨 썩는 밤
잉크병엔 마른 오징어 냄새가 가득 쌓이고
청주-충주●/공주-광주○;상주-무주◎/원주-진주;
손가락 뜨거운 도시마다
불기둥 솟는다
L의 외출
김영찬
엘이 외출한다
L 상표의 엘
L의 조급한 외출준비 저것 좀 봐, 엘이
빨래줄 위에서 춤추네!
채 마르지도 않은 속옷 L,
유명상표의 린넨 거들이 건들건들 건조대에서
쿨럭쿨럭 바튼 기침도 해대며
엘을 맞는다
엘은 L을 데리고 아니,
L이 엘을 데리고
외출한다
만일 L이 엘을 뿌리치고 떠나는 날엔 엘은 영락없이
국적 잃은 미아
샴푸머리 푸수수한 엘이
향수냄새 팡팡 진한 L의 몸뚱이에 갇혀
엘은 외출한다
노랗게 물들인 수염
김영찬
그가 미리 전화를 건다
나 오늘 이사 간다!
동쪽 태양과 서쪽 태양이 눈 마주치면 서로 먼저
인사하는 나라
그는 새벽마다 무작정 떠나고 없다
딸이 이삿짐 위에 커다란 안개꽃 다발을 꽂았다
아내에게 진즉 살림살이 세간 곳곳에
고무풍선을 매달아 놓게 하고
이제 떠난다
이담에 보자!
덥수룩한 그의 수풀수염에 가려졌던 금니가
반짝 빛을 튕겼다
추운 나라의 봄은 짧은 거여, 이 눔 자슥!
아버지는 그를 만류, 삿대질하다가
풀죽어 돌아선다
잘 가, 이 담에 안부 나누자!
그와 전화를 끊고
바깥 풍경은 는개에 젖고
몽롱한 꿈에서 꿈을 깨는 아침은
자주 덧문을 닫지만
광화문 인파 속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되는 건
금방 10년이 안 지난 훗날, 이 된다
으흐흐흐~
노란 수염 더부룩 더 노랗게 물들이고
유령처럼 썰렁하게 나타난
내 모습,
친구 녀석!
거울에게
김영찬
난쟁이나라에 갈 필요가 있을까, 있을까
나는 이미
거인,
거인이 되어있는데, 있는데
난쟁이 나라에 갈 필요가 있을까, 있을까
뭐라고 나는 아직도 난쟁이, 난쟁이 신세라고
난쟁이 혈통인 걸 어쩔 셈이냐고?
거울아 말하라, 녹슨 거울아
말하라
거인족의 나라에 가서 거인들이 걸쳐 논 무지개를 걷어와
난쟁이나라의 침실에 장식해 줘야한다고,
그렇게 하라고
말하기 싫어도 말해다오, 거울아
조각난 거울아,
―난장이의 키가 자라고 있잖니
명왕성행 마지막 비행접시
김영찬
이봐요, 플루토에서 온 아가씨,
정확하게 1분 하고도 1초 지났다고요?
정확하게 1분 1초~^*
그런데 그 사이 맘
이 싹 변한 걸 어떡하느냐고요?
뚜껑 딴 술병의 술이 김빠져 나가듯이
엎질러진 술이 속옷 적시듯이
한 번 열 올랐던 사랑도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도수 낮아져
하수관 꽉 막힌 개수대에 썩어 고이는 걸
어떡하라고~,
이봐요~,
그러니까 플루토에 갈까 말까 아직도
망설이는 아가씨
정말 유효기간이 지났으면
명왕성이 폐기되듯 태양계에서 아예 사라져주는 게
예의가 아닐까요, 요요요~요?
이보라니까요 글쎄 플루토를 못 잊는 아가씨
그렇더라도 사랑은
그렇게나 많은 시간과 돈을 뿌린 것이 아깝지만
유효기간은 연장 안 되고
플루토는 여기서 너무 먼 거리
가 볼 수 없어서,
가보고도 마음 읽을 수 있을까 싶지 않아서
머리에 플루토 머리핀을 꽂고 다니다가
플루토로 가는 마지막 비행선을
꿈속에 떠나보내고…,
□ 시작노트/김영찬
그때는 내가 서정시를 쓰고 있었기 때문
여름이 끝난 자리에 봄이 오고 봄이 지나간 자리에 여름이 또 열병을 몰고 침입하곤 했다. 간간이 다른 계절이 틈입하기도 했으나 짧디 짧은 겨울이 콧등 스쳐지나갔을 뿐, 기록을 남기려 애쓴 건 막간에 접지른 indian summer의 기억, 단풍든 시간이었으나 그것들조차 화석을 남기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랬다. 수목의 줄기와 건물의 뼈대가 조금씩 굵어지거나 높아지긴 했으나 그로 인한 눈높이가 달라질 형국은 아니었다. 가슴은 늘 뜨거운 태양을 안고 뒹굴었다. 그에 따라 내 정신의 아비시니아 고원, 불모지의 풀들은 시들거나 메말라갔으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킬리만자로의 만년설, 설선(雪線)이 내려앉는 게 문제였다. 그때는 내가 서정시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을 날던 수리독수리가 이유 없이 날개 부러지는 사건이 빈발했다. 내가 피워 올린 굴뚝 연기가 방향 없이 흩어지는가 하면 접어서 날린 비행기가 추락하는 일이 벌어지기 일쑤. 그때는 내가 서정시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디까지 왔는가.
No where —> Now here라고 쓰고 흙으로 덮어버렸다. 높은 산에 올라가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내가 갈 곳에는 깃발이 없었다. 그렇다, 나는 이제 이름 없는 별 위에 아나키스트로 남는다. 위대한 침묵 뒤에는 위대한 기록이 남는다는 신념은 무너졌다. 위대한 침묵은 위험만 따를 뿐, 임을 확인하는 순간, 잉크를 찍을 펜을 찾았는데 그때는 이미 너무 늦은 저녁— 사람들이 흩어질 시간임을 나는 안다. 오~, 오오(嗷嗷) 오(誤) 서정시를 쓸 때의 무절제했던 행복이여! 나는 이제 아포리아의 비결을 찾아 광야에 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계간 시선 2009년 12월 겨울호 특집, <우리시의 현주소> 4인 초대석
'나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스크림 공장 공장장 (0) | 2009.12.31 |
---|---|
[스크랩] 지난여름 갑자기/김영찬 (0) | 2009.12.06 |
키스가오감을자극하는이유원인규명연구회맴버들께 (0) | 2009.11.29 |
아이스크림 역사서 (0) | 2009.11.20 |
구름의 헛기침 (0) | 2009.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