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몽유도원/임희숙

바냔나무 2009. 5. 1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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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임희숙




몽유도원




                                         임희숙



팽나무 서쪽에서 잠이 들었다
햇볕이 뜨거워 나무 밑둥치를 더듬었을 때
보이지 않던 구멍 하나가 손에 잡혔다
팔 하나를 접고 다리 한 개를 부러뜨리고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꿈처럼, 거기 계곡이 흘렀고 꽃잎이 떠내려 왔고
어디서 노래 소리도 들렸다
오래 걸어서 배가 고팠지만 물맛은 달콤하고 향기로웠다
저 물길을 거스르면 배가 메어져 있는 풍경을 만나리라
그러나 배에는 오르지 말라
배를 버리고 벼랑을 돌아 칼처럼 빛나는 산을 넘으면
데자뷰처럼 복숭아밭이 보일 것이라고 심장이 말했다
아무도 살지 않을 것처럼 마을은 적막했고
커다랗게 치마를 벌려 복숭아를 땄다
잘 익은 과일의 향이 즙에 뭉개지도록
실컷 따 담으라고 쿵쿵거리며 심장이 재촉했다
잔털이 날려 목덜미를 더듬었고 치마가 길게 찢어졌다
나는 올 굵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미 팔 하나와 다리 한 개는 부러져 있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분홍빛 계집아이들이
배꼽에 매달려 몽롱하게 젖을 빨아대는 것이었다
자꾸 눈물이 났다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생리였다



*무크지 <정표예술포럼>발간, 『꽃이 바람의 등을 밀다』(혜화당 2009.5월 인쇄)
[출처] 박유라 시인의 블로그에서|작성자 푸른책



ㅁㅁ
마지막 2행 '자꾸 눈물이 났다/마지막이 될 것 같은 생리였다'라는 말이
응어리 맺히면서 끝나는 이 시는
비극적이라기보다 자연의 이치대로 순응,
폐경기조차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화자의 마음가짐이
담담히 전달된다.
그것은 바로 화자 자신을 도원으로 안내하여 몽유에 든 자신을 거기서 발견하는
과정으로 진행되는데 그것은 또한 '아무도 살지 않을 것처럼 마을은 적막했고/
커다랗게 치마를 벌려 복숭아를 땄다'할 정도로 비극적이기도 하다.
(김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