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휴화산의 분화구를 청소하다 -김영찬

바냔나무 2008. 10. 1. 12:34

 

 

 

 

휴화산의 분화구를 청소하다

                                      -김영찬




원시사회가 처음 선택한 의사소통 도구는

단어와 문법이 분절되지 않은 발성과 몸짓, 리듬 들이 집합체로 뭉친

모방적(mimetic) 소통방식, 'Hmmmmm'이 아니었을까.

-스티븐 미슨,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에서




 언어란 수만 미터 암반 아래 끓고 있는 마그마이다. 용광로를 거치지 않은 이 무형의 질료는 영혼을 갖추기 이전의 순수, 영적인 상태에 있다. 그것은 당신의 심장 판막에 위치한 모든 휴화산들이 다 그렇듯이 언제든 뜨거운 용암을 쏟아낼 가능태로 존재한다. 시인인 나는, 밥 잘 먹고 똥 잘 누고 하늘 쳐다보다가 결심한다. 언제까지 방치해서는 아니 될 이 세상의 무질서(역설적으로 조악한 질서에 대한 반항심으로)와 무서운 나태가 나를 덮칠 때, 삽날처럼 날카로운 펜촉에 잉크를 묻히고 나는 사화산의 분화구로 걸어 내려간다. 사화산의 분화구 내부는 협소하고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차 있다. 위험하고 자폐적이다. 아무도 나의 노동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게 빤하므로 외로운 사역이다. 그렇지만 나는 통로가 꽉 막힌 사화산 뚜껑을 열고 출구부터 넓힌 다음 비좁은 분화구 안으로 내 몸을 밀어 넣는다. 암반층까지 꼼꼼히 분화구를 청소하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사화산은 죽어 있었던 게 아니다. 그것들은 휴화산으로서의 권위를 지키려 노력했으며 침묵의 무게와 묵행의 가치를 언어의 특장으로 보존하려고 애쓴 흔적을 남기고 있다. 불현듯 찾아온 나를 반기는 이유는 언제든 뇌관에 불을 댕겨 당당하게 타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생이란 무위, 무량한 것. 하지만 암반 아래의 언어들은 방치되어있는 게 아니라 쉬고 있는 것이다.  

 시인인 나(별볼일없어 미안하고 미약하지만)에게 지적당한 그대들 휴화산들이여. 이제 세상의 겉거죽, 열정이 식어 쭈글쭈글 탄력을 잃은 늙은 지구의 땅거죽 위에 뜨거운 마그마를 쏟아 부을 때가 오지 않았는가. 그대들이 올망졸망 피워 올릴 활화산의 봉화가 타성에 젖은 이 지구, 무기력한 지구인들에게 고작 대낮의 횃불이 되지 않을까 의문이지만.

 하지만 마냥 싱겁고 마냥 게으른 이 행성에 매우 뜨거운 그 무엇이 끓고 있었다는 증거는 확실하다. 화산재 연기가 퍼지면 징조가 나타나겠지. 그렇다, 위험이 닥치더라도 기왕에 초대형 거대한 활화산을 설계해야한다. 이 지구를 태양보다 밝은 별로 만들자면 초유의 일대 폭발이 필요하다. 나의 시는 대폭발에 대비하여 분화구를 사전 점검해 두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언표이다.

 

 


*계간 <시선> 2008.9월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