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김영찬의 쥬이쌍스 시론

바냔나무 2008. 1. 6. 12:48

김영찬의 쥬이쌍스 시론

 

바냔나무 ․ 바냔나무

                                                                                                 김영찬(시인)

 

 

 

 잠 못 이루는 밤에 시를 쓰고 읽는다. 불면의 밤을 포섭하는 시들은 결론 없는 몽유의 긴 여행이다.



가) 행복이라는 모호한 주제, 주체

 ――한 시인이 내게, 행복은 어떤 거냐고 물었다. 화진포에 가고 싶을 때, 불현듯 화진포로 떠날 수 있는 것, 이라고 대답했다. 잠 못 이루는 밤에 행복에 대하여 되묻는다면, 살구꽃 그늘에 앉아 꽃이 지는 저쪽 세상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람, 그 사람을 위해 봄밤에 홀로 산책 나온 사람이 살구꽃 나뭇가지를 더 많이 예비해 주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불면의 밤에 봄꽃을 무더기로 피워놓을 수 있는 사람, 그는 분명 이 세상 끝까지 행복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불면증 환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봄의 뜨락에 그 많은 봄꽃을 피워놓을 수 있을까. 난해한 현대시를 끝까지 탐독할 수 있는 사람은 봄밤을 지새우는 몽유병자라야 할까. 언어와 언어가 연대하여 밀고 나가는 조화로운 세계. 시 안의 술어가 역동적인 힘으로 주어를 밀어주는 동력, 그 활동(活動) 에너지가 시 전체에 고루 퍼져나가는 느낌을 나는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시의 행과 행은 살아있는 생물체, 한 파충류가 섬세한 예비동작을 통해 독자의 호흡 속에 파고들어와 행보를 같이 하는 느낌을 나는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잖은가? 시가 의미를 넘어 지향하는 저편의 세계, 곳곳에 편재한 음악적 요소, 의미를 따지기 이전에 자유로이 펼쳐지는 신비한 음색(nuance)들. 그리고 거기에서 뜻하지 않게 도출되는 다의적인 모호성은 또 다른 전율의 세계로 나를 안내한다. 그때 시어들은 오히려 명료해지고 의미는 무한대로 확산되기 때문이다.

 

 



나) 모차르트에게 투구를 씌우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정상적인 질서 안에서 불면의 밤이 끝나게 된다면, 반어법과 억측, 독설과 모순, 터무니없음과 허무맹랑함이 흔쾌히 혼재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어떤 어둠 속에선가 형용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혼란, 자가당착이 절대적인 힘에 의해 섬광을 발하여 조화와 통일로 가납되는 순간, 시는 태어난다. 그러므로 시인이란 조금도 거창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이 답답한 실존, 현실과 타협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주 엉뚱해지고 싶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엉뚱함이란 어리석음과는 대별되는 자유, 자유혼으로써 불화와 불만에 대적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하는 순수 욕망이어야 할 것이다. 순결, 고결함, 순수로 응고된 욕망이 극점의 얼음덩어리처럼 차갑고 매운 결정체로 이마에 딱 부딪친 이마쥬(image)가 될 때, 시는 에스프리의 깃발로 나부낄 것. 그러므로 시인이 아니면서 시인이기도 한 나는 당신에게 정중히 말한다.

‘모차르트에게 투구를 씌우지 마십시오!’


 

 


다) 의미를 넘어선 곳에 의미가 있다

 왜 시를 읽고 쓰는가. 왜 노래를 부르고 노래를 들으며 그림을 그리고 감상하는가. 보상 없는 행위는 결코 지속되지 않는 법. 어떤 예술장르에 몰입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그 작품을 통해서 얻게 되는 쥬이쌍스(jouissance)라는 특별한 보상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 논리를 추종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시는 단순히 재미있는 일 그 자체이다. 지성과 감성을 자극한다. 그래서 나는 시를 쓰고 읽을 수밖에 없다. 단순성을 넘어서 복잡한 구조로 미로를 헤매게 하는 시일수록 읽는 재미는 배가된다. 태풍에 휘말리는 듯 그러나 정신은 쇄신되고 상상력이 증폭되는 시. 그런 시를 나는 사랑한다. 시를 읽는 동안 맑은 심상에 오관이 찌릿찌릿해지는 현상, 이것을 일컬어 지적 쾌락, 쥬이쌍스라 하지 않는가.


 ‘말을 넘어선 말’은 가능할까, 라는 명제를 떠올려본다. 시가 어디까지 엉뚱함 그 자체를 수용할 것인가를. 초의미어(zaum)의 향기가 묻어날 때 나는 전율한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을 이화(異化), 비일상화하는 데 있으며, 우리의 지각을 어떻게 하면 어렵게 만들어 지연시킬까 하는 것. 그러므로 나는 ‘말은 하나의 꾸러미다. 의미는 그 꾸러미에서 여러 방향으로 빠져나오지만 어느 하나의 공식적인 지점을 향하지 않는다.’ 고 말한 만델슈담의 말에 공감한다. 다의미가 반드시 다중성, 즉 수많은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가 연결해 파생시키고 결합하는 의미망의 관계, 그 관계항이 이루는 새로운 의미의 세계를 창출해 가는 것, 그것이 시라고 생각한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시어와 일상어의 대립성을 증명하는 것에 주력했다. 일상어가 언어학적 재현 즉, 음성, 형태론적 요소 등이 독자적인 가치를 갖지 못하고 의사소통의 기능만 갖는 데 비해 시어에 있어서는 의사소통 목적은 부차적이고 오히려 언어학적 재현이 자율적 가치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시어와 산문어의 대립성을 증명하는 것이 자신들의 중책이라고 생각했다.

 시어란 자율적인 의미망을 갖는 것으로 순수한 음성, 혹은 글자로 축소된 기호나 다름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시의 언어란 이렇듯 그 구성만으로 예술의 수용자이자 소비자의 자동화 감각을 새롭게 하는 데 의의가 있다. 그 지각과정 자체가 예술의 목적이므로 이를 연장해야 될 의무가 있는데 그 때문에 지각의 난이도와 지속을 강화시켜 주는 ‘낯설게 하기’와 ‘난해한 형식의 장치’가 요청되지 않을까.

 

 

 


라) 시가 시를 쓰도록 놔두자!

 나는 왜 모차르트에게 투구를 씌우지 말라고 주문했는가. 나는 왜 러시아 포말리스트(formalist)들의 이론에 이처럼 흥분하는가. 모차르트의 음악은 기표나 기의를 완전히 전복시킨다. 표제음악의 울타리를 부순 무의미의 지평에 모차르트의 선율이 있다. 그것은 ‘시가 시를 쓰도록 놔두라’는 옥타비오 빠스의 말과 상통하는 것으로써 나는 빠스의 말에 적극 찬동하기 때문이다. 시를 혹사시키지 말라. 언어로 하여금 언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유연히 흐르도록 그냥 놔두라. 그래야만 시가 시를 쓰는 가운데 풍요가 이루어지고 그 풍요 속에서 언어는 자유와 호사를 누리며 우리에게 쥬이쌍스를 싣고 다가온다. 참으로 시는 언어이기를 거부하는 자세로 언어를 넘어선 곳에서 언어가 아닌 다른 존재로 환치되기를 갈망하기 때문에 불면의 밤을 넘나들며 내 곁을 맴도는 것이다.  

 

 

 

*시집, '불멸을 힐끗쳐다보다, 의 <시작노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