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쉼박물관 <가을, 예술의 향기> 시공연

바냔나무 2010. 10. 9. 00:44

 박인환을 주제로 한 시공연, 가을은 목마를 타고오고

 

‘쉼박물관’ 가을,예술의 향기


*곳: 홍지동 ‘쉼박물관’

*때: 2010년 깊어가는 가을, 10월 7일(목) 5:00PM 

 

 연출:김영찬

----------------------------------------------------------------------------------------------------------------

 

 

출연 시인(7명) 창작시 공연


회화나무 평전/ 윤영숙



                                           

  늙은 회화나무 한 그루, 굽은 허리를 쇠기둥에 기대어 쉬고 있다 가슴 한켠

시멘트로 채워진 무거운 노구 이고 남쪽으로만 길을 내는

곁가지들 건들기만 해도 툭- 부러진다.                     


  절벽처럼 땜질한 저 늙은 가슴이 왠지 낯설지 않다.

항아리 속 같은 어둠 열어보면 위암말기판정을 받은 내 아버지 부고장이 다시 와 있을 것 같다                                 

닫힌 몸 위로 스테이플러가 꾹꾹 밟고  지난 수술자국 따라 들어가면

아버지 손때 묻은 족보가 묻혀 있을 것 같다.                               


  노거수老巨樹 아래 떨어진 나무토막을 집어 들었다 아버지가 쓰시던 몽당연필 같고

부러진 안경다리 같은 나뭇가지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애기가 애기를 낳았다며 내 볼 쓰다듬어주시던 까칠한 그 손가락이 만져진다.


  근처 구멍가게에서 막걸리 세 통을 구해 회화나무 할배 발등에 부어주고 달빛 미끄러지는 덕수궁 돌담길 걸어 내려온다 울퉁불퉁한 세상살이가 끝내 염려스러워 실루엣으로 한없이 내 발자국을 따라오는 아버지 긴 그림자,


* 윤영숙 시인: 충남 홍성 출생. 계간 <애지>로 등단, 한국시인협회 회원.

 이메일 : sook01220@hanmail.net

들꽃 여관에 가고 싶다/ 박 완 호


 


들꽃 여관에 가 묵고 싶다


언젠가 너와 함께 들른 적 있는, 바람의 입술을 가진 사내와 붉은 꽃의 혀를 지닌 여자가 말 한 마디 없이도 서로의 속을 읽어 내던 그 방이 아직 있을지 몰라, 달빛이 문을 두드리는 창가에 앉아 너는 시집의 책장을 넘기리, 삼월의 은행잎 같은 손으로 내 중심을 만지리, 그 곁에서 나는 너의 숨결 위에 달콤하게 바람의 음표를 얹으리, 거기서 두 영혼의 안팎을 넘나드는 언어의 향연을 펼치리, 네가 넘기는 책갈피 사이에서 작고 하얀 나비들이 날아오르면 그들의 날개에 시를 새겨 하늘로 날려 보내리, 아침에 눈뜨면 그대 보이지 않아도 결코 서럽지 않으리


소멸의 하루를 위하여, 천천히 신발의 끈을 매고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던 나의 전부를 남겨 두고 떠나온 그 방, 나 오늘 들꽃 여관에 가 다시 그 방에 들고 싶다

 

 


* 박완호 시인 : 충북 진천 출생. 계간 ≪동서문학≫으로 등단, 한국시인협회 회원, 시집 『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아내의 문신』/  이메일 : parkwanho@hanmail.net

 

 

녹색비단구렁이/ 강영은



어머니. 천둥번개 치고 비 오는 날이면 비 냄새에 칭칭 감겨 있는 생각을 벗어버리고 몸 밖으로 범람하는 강물이 되고 싶어요 모과나무 가지에 매달린 모과열매처럼 시퍼렇게 독 오른 모가지를 공중에 매달고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신부가 되어 한 번의 낙뢰, 한 번의 키스로 죽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내 몸의 죽은 강물을 퍼 나르고 싶어요


하지만 어머니, 내가 건너야 할 몸 밖의 세상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뿐이에요 눈부시게 빛나는 햇빛의 징검다리뿐이에요 내 몸에 똬리 튼 슬픔을 불러내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연두에서 암록까지 간극을 알 수 없는 초록에 눈이 부셔 밤이면 독니에 찔려 죽는 꿈들만 벌떡벌떡 일어나요


어머니, 녹색비단구렁이새끼를 부화하는 세상이란  정말이지 음모일 뿐이에요 희망에 희망을 덧칠하는 초록의 음모에서 나를 구해주세요 제발 내 몸의 비단 옷을 벗겨주세요 꼬리에서 머리까지 훌러덩 벗어던지고 도도히 흐르는 검은 강, 깊이 모를 슬픔으로 꿈틀대는 한 줄기 물길이고 싶어요


* 강영은 시인: 제주 출생. 계간 《미네르바》로 등단, 한국시인협회 회원, 한국과학기술대학 강사, 시집 『녹색비단구렁이』 등 /  이메일 : kiroro1956@naver.com 

구름의 전언/ 정재분 





꽃아

가을에는 피지 마


더할 나위 없이 무성한

이파리 사이로


목울대 길게 빼고

홀로 피어나


속절없이 흔들리는 꽃아

가을에는 피지 마


붉디붉을지라도 

꽃아 가을에는 피지 마


천지에 온통

꽃향기 휘날릴 때


이파리보다 먼저,

덩달아 피려무나


아직은 바람 맵지 않다고

첨벙첨벙 피는 꽃아


가을에는, 

가을에는 피지 마






* 정재분 시인: 대구 출생. 계간 《시안》으로 등단. 한국시인협회 회원.

시집 『그대를 듣는다』 등 /  이메일 : chrom21@hanmail.net

말술/ 이덕주





그녀는 말술이다

나도 말술이다

그녀가 잔을 비울 때

나는 말을 비운다

내가 말 할 때

그녀는 술을 마신다

내 말을 안주 삼아

그녀는 술을 마시고

그녀의 술에 취한 나는

그녀의 빈 잔을 말로 채운다

그녀는 말을 남기고 술을 마시고

나는 술을 버리고 말을 마신다

그녀는 말술이다

나도 말술이다


새벽 네시

그녀의 입술이 소주병처럼 푸르다



* 이덕주 시인: 충남 논산 출생, 시인/화가, 문예지 《문학21》로 등단, 시집 『내가 있는 곳』등 / 이메일 : djl2000@hamail.net


가을 밤, 둥지를 틀다/ 김리영


                                     

홍지문 곁 쉼박물관 정원 감나무 꼭대기에

새들이 비뚤게 둥지를 지었다.

피뢰침 솟아있는 허공에 얼굴을 대고

하늘빛 이불 덮은 새 두 마리.


천둥 번개 치는 밤,

비바람에 휩쓸려 사라져버린다 해도

위험한 배경을 깨닫지 못한 채

포근히 깃털을 잠재우고 있다.


함께 깃들어

오늘 불온한 사랑도

온 몸에 따뜻이 전해오는 평화로운 봄 밤,   


새들의 꿈은

간혹 안톤 체홉의 단편소설처럼 마지막 단락에서 역전하겠지만,


내가 생의 말기에 꿈꾸는 따스하고 안온한 것이

지금 저 둥지 안에 깃들어 있다.

 

 


* 김리영 시인: 서울 출생. 월간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국시인협회 회원. 시집 『1054년에 폭발한 그』 등 / 이메일 : kamrhee@hanmail.net

 

 

                  두 대의 피아노와 당나귀/ 김영찬


 

 

 


두 대의 피아노와 한 마리 당나귀가 있다


당나귀는 귀가 너무 커서 타악기소리를 싫어한다

그러나 과도하지 않게 언제나 피아노 건반 위를 뚜벅뚜벅

걷는, 걸어가면서 산책 중 명상에 잠기는

습관이 있다


당나귀 발굽을 닮은 내 손바닥엔 두 대의 피아노

――한 대는 피아니시모

――또 한 대는 피아노포르테

흰 포말 부서지는 해안에서 안단테와 비바체

그리고

하얀 건반을 두드리고 지나가는 광풍들

해안선 저쪽에는

반라의 연인들을 그늘에 숨기는 검은 건반의 숲도 있다


두 대의 피아노와 한 마리 당나귀라고 나는 썼지

그랬지

두 대의 당나귀와 한 마리 피아노라고

고쳐 적으련다

한 마리의 검은 피아노가 두 대의 당나귀 갈기와

말총꼬리를 붙잡고 속도를 내겠지

그러면

고리타분하기로 소문난 저 지구의 한 쪽 모서리가

발굽 닳아서

일상이 기우뚱 기울겠지


그러므로 과도 하지 않게 ‘알레그로 마 농 트로포’로 가자고

당나귀 귀에 대고 속삭여야 겠다

사랑은

allegro ma non troppo, 라고 피아노가

알아차릴 때까지



* 김영찬시인: 충남 연기 출생. 계간 《문학마당》으로 등단. 한국시인협회 회원. 시집 『불멸을 힐끗 쳐다보다』 등.

email: tammy3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