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새로운 세상》*의 책

바냔나무 2009. 8. 20. 16:22

 

 

 

 

 

 

새로운 세상》*의 책

김영찬

 

 

 

 

어떤 책들의 진로에는 이정표에 없는 정거장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있는데

다시 L의 나라에서 내가 읽은 책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읽지 않고 구석에 방치해둔 책

어떤 한가한 날 내게로 걸어 나온 책

마뜩찮아 서먹서먹 눈길 피해야만 했는데

어느 한 순간 마음에 들어와서

뜨악했던 옛 애인과 몸 살짝 마음 철썩 비비게 된 그 밤처럼

밀가루 반죽 주억주억 잘 풀리게 된 책, 속의 책,

속의 밤에

 

어떤 책 L의 나라에서

내가 읽다가 잠깐 길을 헤매게 된 책

책갈피에 네가 열 손가락 펼쳐 지적해준 꼬불꼬불

행간의 좁은 골목길

거기서 고개 뒤로 제켜 바라보면 첫사랑 소녀의 창문 높이 불이 켜져

옛날로 반쯤 다가서게 된다는 걸 알려준 책

어떤 책 속의 책갈피에서

뜬금없는 한낮에 아이스크림이 녹아 머릿속 끈적끈적해지고

또 마시지도 않을 뜨거운 찻잔을 엎어서

바짓단에 세계지도가 그려진

얼룩을 남긴 책

 

추억의 어떤 책들은 갈피마다 정거장이 주렁주렁

너무 많이 달려 있어서

장미꽃 다발을 과적한 트럭이 바퀴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꽃잎은 으깨져 짓물렀어도

새로 자전거 전용도로를 닦아 논 책

꾸불꾸불 책 속에 산악자전거 하이킹 코스가 좋아서

휘파람 날리며 바람개비 돌리던 소년(아마 책 속의 주인공이었을 거야) 정강이가 깨졌지만

그런 책 속엔 꽃가게 주소가 수록돼 있다

 

소녀에게 줄 꽃을 사는 소년들 명단이 실려 있어 좋은 책

태극선 부채 속에 얼굴 그려 넣은 책

네 얼굴이 태극선 중심선 안에서만 뱅글뱅글 동심원 만들어

그리움을 방점 찍는 그 책 속으로

잉크냄새 풍기는 시간이 압축된다, 그리고 그 책갈피에

믿음 두툼해지는 어떤

책들에는

폭설로 길이 막힌다

너무 많은 눈이 와서 눈길에 퍽퍽

긴장화는 벗어지지만

눈사태를 만나 길이 막혔다는 핑계로

기왕에 눈사람이 된 사람들

그들은 눈 오는 나라로 이적해버린 뒤

다시는

재입국해 돌아오지 않는다 그 책 속에서

나무꾼으로 입적한 그들은 아예

귀환하지 않을 게 뻔하다

그리운 이들이 편지를 써서 펄럭이는 책장마다 소식 묻지만

답장은 그 다음 해에 오거나 녹아버리거나

삭정이 부러진 숲에 다람쥐나 드나들 뿐,

계절이 자주 바뀌는 책

 

어떤 책, 책들이 꼬깃꼬깃 때 묻은 지폐처럼 접혀 악취를 풍기지만, 때구정물 죽죽 흐르는 행간 따라 긴 방죽을 넘어 무허가 집들이 모여 있는 방죽을 따라가면 아득히 출렁이는 바다, 마을 바깥에 바다가 대기하고 있는 게 여간 다행이 아니다 거기서 매일 밤 종이배를 접어 띄우는 꼬마들이 선원이 되어 돌아오는 빈도가 많아지는 책

L의 나라 출판국에서 편집한 양서들을 종이배에 가득 싣고

머나먼 항해를 하는 책 속의 책, 속에

바람개비를 안고

달려오는 네가 내 품에

풀썩 안기는

그 책, 책 속에 수평선은 드넓어지는데

너를 만나 너를 맞아들이는 순간

황홀한 저녁이 오고

그런 후

느리게, 느리게 밤이 술 익어가고

어둠이 무한정 네 숨소릴 보살펴 주도록 진행될 게 분명한 상황에서

창가에 도열한 나무들은 우우웅~ 웅웅^ 문풍지 소릴 내다가

컴컴한 책의 내부로 걸어 들어가

튼튼한 뿌리가 돼준다

 

어떤 책, 우리가 접어두었다가 읽게 된 정거장이 주렁주렁 매달린 책

청포도 줄기에 매달린 과수원, 포도송이책

 

 

*오르한 파묵의 소설, 《새로운 세상》

 

 

-계간 <애지> 200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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