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그 나무 푸른 그늘 아래

바냔나무 2007. 10. 31. 14:17

  

 

그 나무 푸른 그늘 아래



 

 


그 나무 푸른 그늘 아래

                                            김영찬

 





그 나무 푸른 그늘 아래 한 그루 나무인 나는
가야할 어디도 마땅치가 않았네  
잠깐 바람의 어깨 위에 네 종이 피아노를 올려놓을 게!
구름의 옷소매나 잡고 흔들었을 뿐이네
그 나무 푸른 그늘 아래
저녁 일곱 시,
굵고 완강한 시계 바늘이 황혼에게 길을 내주면
나무는 밤을 끌어안고 뒹구네
나는 귀 기울여 듣다가 몸을 굽히네  
성문 앞 우물곁을 지키는 보리수가 아닌 너에게도
짝사랑이란 힘들고 애틋했던 거야
그가 듣고 있지 않더라도, 내가 필요하세요,
필요하세요?
너는 혼잣말로 속삭였던 거야

오후엔 꽃가게 아가씨가 널 찾아올 테지
혜화동 버스를 타기 위해 그녀는
고운 머릿결, 짧은 스커트 자락을 나풀거리며
그 나무 푸른 그늘 아래 네 곁을
훅— 지나칠 테지
레몬향기 갯바람소리가 묻어난다고 너는 말했어
그 아가씨가 어느 날 네게 말했지, 인생이여 고마워요
Gracias a la vida!
인생이여 고마워요!
그런 밤이 몇 번씩 악보에 실리고
그녀는 밤으로부터 멀리 떠나고 없는 여인
사랑하는 이에게 초승달을 보냈네

사랑은 긴 편지를 쓰고
그녀가 처음 울던 밤의 초승달은 영창 가에 찾아와
주루룩 눈물을 흘렸겠지
내 눈동자에 맺힌 그대 모습, 당신을 들여다봐요
나무는 댄스 하듯 푸른 손 내밀고
그 나무 밑 찾아와
사랑하는 이여, 안녕이라 말했다 해도 나는 그댈
떠날 수가 없어요

그 나무 푸른 그늘 아래 잠 못 이룬 밤들이 무수히
눈 감지 못하듯이



*월간 <현대시> 2007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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