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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르트르, 이 남자의 연애법

바냔나무 2010. 10. 10. 23:59

 
사실 이는 윤리적 정당성은 둘째치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단 한 명’에게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자,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달랐다.

20세기 프랑스 최고의 지성, 사르트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굳건히 한 위대한 철학자이자, 소설, 평론, 극에서 활발히 활동한 뛰어난 문학가였다. 또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 1986]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긴 인문학 저서, 『제 2의 성』을 통해 여성해방운동의 물꼬를 튼 진보적인 여인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시대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는 자의식이 매우 강해, 연애관계에서도 실존주의적 사유를 체현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1929년부터 사르트르가 사망한 80년까지 51년간 이어졌던 그들의 ’계약 결혼’이었다. 작은 키에 사시에다 추남에 가까웠던 사르트르 – 그러나 화려한 스캔들을 몰고 다녔던 ‘이 남자의 떠들썩한 연애법’을 공개한다.


사르트르 철학의 핵심은 ‘사회참여’[앙가주망, engagement]다. 인간은 결정된 것 없이 우연에 근거한 이 불안한 세상에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내던져진 ‘개별자’다. 완전한 고독과 함께 최대한의 자유를 타고났기에, 매 순간 적극적인 선택을 통해 자신의 가치와 미래를 직접 설계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때문에 우리는 사회에 치열하게 동참하여 자신의 실존과 시시각각 마주해야 한다. 진정한 자유란 이러한 자발적인 구속을 감내해낼 때, 비로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실존의 생생한 경험 – 이는 고통스럽지만, 살아가는 동안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 짊어진 과업이자 숙명과 같다.

때문에 사르트르가 ‘행동하는 양심’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데모와 집회에 꾸준히 참여했으며,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공공연히 밝혔고, 자국 프랑스를 비판하고 알제리 독립을 지지함으로써 아파트에 폭탄 위협을 받기도 했다. 또한,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문학작품에 등급과 가치 순위를 매기는 일체의 행위를 거부하는 의미에서 1964년 노벨 문학상 및 몇 개의 권위 있는 문학 상을 거절하였다. 환각 상태를 경험하고자 메스칼린을 투여하여, 그때의 지각상태를 『상상력』이라는 작품으로 남긴 일화도 전해진다. 보부아르와의 계약 결혼 역시 실존주의를 몸소 실천한 결과였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맺은 계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서로 사랑하며, 타인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허용한다.
-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비밀이 없도록 한다.
- 경제적으로 독립한다.


이들은 가사를 돌보지 않기 위해 보부아르의 제안대로 호텔의 다른 방에서 생활하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염문을 뿌렸다. 그 중엔 주고받은 편지가 책으로 출간될 정도로 치명적인 사랑도 있었다. 사르트르가 보부아르의 매력적인 여제자 올가, 그리고 그녀의 여동생과도 관계를 맺는 동안, 보부아르는 올가의 남편과 정사를 벌였다. 심지어 나이가 한참 어렸던 사르트르의 연애 상대를 그들이 양녀로 입양했던 일은 유명하다.

유교적 사고가 뿌리 깊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들의 연애 행각은 충격이자 방종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겉으로는 화목해 보여도, 속을 보면 의심과 집착, 혹은 외도로 곯아있는 위선적인 관계가 얼마나 많은가? 물론 이들 역시 인간이기에, 이간질을 하거나 상대방의 혼외 정사에 질투하는 허점을 보였다. 사르트르가 그들이 서로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진 않는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정신적 친구이자, 각자의 신간을 가장 먼저 읽고 토론과 논쟁을 통해 사상을 자유롭게 개진했던 동료로서 평생 반려했다.

현대 사회에서 이혼과 헤어짐은 빈번하지만, 만약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처럼 서로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한다면, 그 결과는 좀 더 긍정적이지 않을까? 상대방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은 스스로의 자유 또한 확보하는 길이다.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솔직해지는 것 - 이는 연인관계에서 질투, 분노, 집착 등의 감정을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힘들어도 감내하는 인내를 의미한다.


사실 51년이라는 수치는 중요하지 않다. 언뜻 불안해 보이지만 실상 너무나 견고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죽음이 갈라놓지 않았던들 영원히 지속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자아가 닮은 영혼의 쌍둥이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흔히 첫눈에 반하는 로맨틱한 사랑을 꿈꾸지만, 이제 조금 방향을 틀어 연인이자 친구 또한 동료로서 함께 상승할 수 있는 ‘내 영혼의 쌍둥이’를 만나기를 꿈꿔보는 것은 어떨까?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Written by cowgirlblues (cowgirl@artnstudy.com)
 

출처 : 나무 그늘 아래서
글쓴이 : 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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