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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는 왜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은가

바냔나무 2008. 9. 21. 15:50

 

 

 

현대시는 왜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은가


 

현대시는 왜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은 왜 타당한 이유이며 그럴 수밖에 없으므로 당연한 것인가                     

 

 김영찬(시인)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샤르트르

 논제를 이끌어내기 전에(아니 논지를 편하게 끌고 가기 위해), 우선 특이한 시 한 편을 읽어보자. 이 시는 환상적 리얼리즘 계열의 시인으로서 기존 서정을 과감하게 파괴, 엄연한 기성질서와 기존의식을 거세게 무너뜨린 다음 바로 그 자리에 포스트모던한 문체로 엉뚱한 발상과 낯선 화법을 통해 과격한 근대적 감수성을 대입한 (그래서 곧잘 논란의 소용돌이 에 휘말린) 황병승 시인의 두 번째 시집,『트랙과 들판의 별』(문학과 지성사 2007.9월 출간)에서 따온 것이다. 진정한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될 수 있다(엘리엇),고 볼 때 자아 분열적이고도 몰개성적인 개인의 신화가 어느 선까지 전개 가능한 것인지 살펴보는 계기 또한 마련될 것이다.


눈보라* 속을 날아서(상)

- 황병승



1


날 수도 없을 만큼 뚱보가 되어버린 새가 있을까……
있다면,
그 새의 이름은 아름다운 로제,

나는 비밀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 세상엔 말이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저희들끼리 귓속말을 나누고 입을 다문다

난쟁이는 작은 녀석을 뜻하지만 그것은 몇 개의 숨은 의미를 가지고 있고
다락방, 낚시, 목이 긴 장화, 배지badge, 맞잡은 손, 외투, 구름, 가루 란 말들 역시
몇 개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세상사람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다락 속의 가루 가루 속의 난쟁이 난쟁이의 외투 외투 속의 구름 구름 속의 배지 배지와 낚시 낚시와 목이 긴 장화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비밀을 한두 개쯤 간직하고 있지만
그것이 음악이 되기 전엔 차가운 동전이거나 혹은 주머니 속의 밀떡

아름다운 로제언니는 이 세상이 하나의 커다란 개미굴 같은 형태를 하고 있고
온갖 소리들로 들끓고 있다고 말했다 수천 년 전의 나뭇잎을 흔들던 바람소리부터
지금 이곳 샌디에이고 퍼시픽 비치의 갱들이 지하실에서 속삭이는 소리까지

그러나 음악이 되기 전엔 그저 만지고 싶지 않은 동전이거나 혹은 주머니속의 끈적거리는 밀떡

나라키, 오스본, 메기와 부기주니어 우리는, 우리들이 찾는 것은, 우리들이 도망치듯이 헤매는 것은
굴속의 사람들
굴속의 노래
음악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아름다운 센텐스sentence

추억의 푸른 종이 달린 지붕 아래서
눈썹 없는 여자는 울어버렸네
우리의 잘못도 아니고
우리가 저지른 단 한 번의 실수 때문도 아니고

"이 살인마 왜 그랬어 바보새끼 뛰어내려!"

창문이 부서졌거나 깨졌거나
이마가 뜨겁거나 식었거나
추억의 푸른색 커튼이 흔들리는 창가에서
눈썹 없는 여자는 그만 울어버렸네

"욕조가 밉다, 이런 욕조가 싫다, 이런 식의 욕조가 날 못 견디게 하지!"

슬픔 속에 있으면서 동정 받지 못하는 여자

다락방, 가루, 가루 속의 난쟁이 난쟁이의 외투 외투 속의 구름 구름 속의 배지 배지와 낚시 낚시와 목이 긴 장화


2


냐라키는 처음 만난 아랍 남자들과 소파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파티 내내 오스본이 곁에서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그녀는 아랍 난쟁이의 난쟁이를 물고 빨고 다른 두 아랍 난쟁이는 그녀의 털 달린 외투와 구름 속에 힘차게 자신들의 난쟁이를 박아대며, "이게 좋니, 이게 좋아, 죽일 년, 암캐, 부모도 고향도 없는 멍청한 년아. 그렇지, 이게 좋지, 말해봐, 아하? 아하? 지옥이 보여? 지옥이 보이지? " 줄 줄 줄 험한 말들을 쏟아냈다.
냐라키는 입 안 가득 난쟁이를 문채 우물거리며,
"죄송해요, 죄송해요, 어떻게 해드려야 좋아요, 저는 암캐이고, 부모도 고향도 없는데, 제 어린 딸을 데려올까요, 교육을 시킬까요, 당신을 볼게요, 당신이 좋다면 당신의 얼굴을 바라볼게요"
울고 있었다


굴 속의 사람들


부끄럽지도 않니, 뒤죽박죽이 끝난 뒤 오스본이 힐책하듯 묻자, 나랴키는 고개를 떨군 채 오스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고멘나사이ごめんなさい(미안해) ……시카시しかし(하지만), 시카시……"


굴 속의 노래


슬픔은 언제나 재빠르게 냐라키를 사로잡고
감출 수가 없는 것이어서 냐라키를 지저분하고 추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로제 언니, 저는 이런 일들을 적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적었습니다
'의지' 라는 말이 두렵고 '지금' '이 순간'이라는 말은 더없이 두려운 것이지만
보여주기 위해, 나의 의지를, 나에게도 의지가 있고, 동생 나오코에게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언니, 의지란 게 무엇일까요

――냐라키


오스본, 메기와 부기 주니어 우리는, 우리들이 찾는 것은, 우리들이 도망치듯 찾아 헤매는 것은
음악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아름다운 센텐스

냐라키에게

냐라키야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는 어린애, 냐라키야
불같은 터키남자는
불이될 시간에
타오르지 못해서
날마다 신경질을 냈단다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해야할까
네 발로 기어서라도
단짝을 찾아 가야지

――로제 언니가

그날 밤 냐라키는 무작정 뉴욕으로 떠났다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타고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snowstorm : 코카인 파티, 마약에 취한 황홀한 상태를 뜻하는 속어.



눈보라 속을 날아서(하)

-황병승

1


우리가 아름다운 로제 언니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사창가 골목 한 쪽에 서서 취객들이 그 앞을 오갈 때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떡cake, 십 달러dollar.


2

부기주니어가 묻는다 "너의 마음을 내가 이해해도 되겠니?"
마음이 마음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
너의 마음을 내가 이해해도 되겠느냐고
나는 부기주니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로제 언니는 우리들 앞에 사등분한 가루를 내놓았다
부기주니어는 그것을 코로 힘껏 들이마시며 다시 묻는다 "이봐 나오코, 그러니까 내가, 너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너의 마음을, 그것을, 내가 조금 나눠가져도 되겠니?"
마음이 마음에게 재차 묻는다는 것
너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내가 조금 나눠 가져도 되겠느냐고
마음이 마음에게 묻고
마음이 마음을 멈칫하게 하고
다가서고
벌리려 하고
하나의 마음이 하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흔들고
나누고
알게 되는 것
나는 코끝에 묻은 가루를 털며 부기주니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의 얼굴이 참 얇다는 생각이 들자 나뭇잎처럼 벌 벌 벌 떨리는 부기주니어의 얼굴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는다 부기주니어, 나의 마음은 너의 마음을 부르고 싶어 아직은 너의 얼굴에 조금씩 눈발이 흩날리지만, 가루가 몸속에 퍼지면, 그때는 순식간에 눈 속에 파묻힐 너의 얼굴, 더 늦기 전에 너의 마음을, 나는 너에게 아무 말이라도 해주고 싶어, 주먹을 움켜쥐고,

"이봐, 부기주니어…… 미안하지만, 나는 불러본 적이 없어. 한 번도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찾아본 적이 없다, 널 어떻게 부르지, 너라는 마음을, 지난밤엔 냐라키 언니가 떠났어, 너도 알지, 매일 매일 누군가는 떠나, 냐라키, 이제 언니를 어떻게 부를까, 너를 어떻게 부르지, 나는 누구도 부르고 싶지 않아, 냐라키라는 마음을, 그리고 너라는 마음을, 또는 그 전체를…… 그리고 동시에…… 또 그 가운데……"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언니 때문에 한자(漢字)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그리고 한자를 쓴답시고 종이에 삐뚤삐뚤 몇 개의 획을 그렸을 때, 냐라키 언니는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이 '흉(凶)'자라고 일러주었다, 잊혀지지도 않는다.

'부기주니어…… 너를 어떻게 부를까, 너라는 두려움을'

다락속의 가루 가루 속의 난쟁이 난쟁이의 의투 외투 속의 구름 구름속의 배지 배지와 낚시 낚시와 목이 긴 장화

오스본, 메기와 부기주니어 우리는, 우리들이 찾는 것은, 우리들이 도망치듯 찾아 헤매는 것은
음악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아름다운 센텐스
사람들은 나에게
너는 옷을 참 못 입지 못 입어
말하지만, 옷을 못 입는 게 아니라
어떤 옷도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십 년(十年)

그동안 사들인 옷들을 생각하면
mother fucker big black shit

너는 참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사람들은 나에게 말하지만
나는 어리석은 게 아니라
어떠한 가르침도 나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십 년

그동안 받은 질책을 생각하면
mother fucker big black shit


3

로제언니는 우리들의 손을 잡았다
우리들도 언니의 둥글고 큰 손을 꼭 쥐었다
테이블 바닥에 흩어진 가루를 뒤집어쓰고
우리는 음악에 맞춰 걸었다 아니 아름다운 로제언니의 작은 다락이 들썩, 들썩 거리며
눈보라 속을 무겁게 나아갔다

이것은 열 종류의 안주와 독주……

어린 메기는 중얼거리며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 속에서
로제 언니의 몸을 휘감고 있는 색색의 문신을 보았다
오스본과 나 그리고 부기주니어는 그런 메기의 표정을 살피며
Bardo Pond, Hannah Marcus, Jessamine, Coco Rosie, Four Tet, Blonde Redhead, Jana Hunter, Sparklehorse, Belle and Sebastian……
오디오가 눈 속에 파묻혀 먹통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로제 언니는 메기에게 자신의 태생과 성장 배경, 그리고 지난날의 사랑과 상처에 대해 들려주었고 메기는 로제 언니가 흘려보내는 소리를 들으며 조금씩 취해갔다
물과 고기 물과 고기…… 이것은 열 종류의 안주와 독주……

우리는 메기가 그렇게 중얼거리도록 두었다, 로제 언니의 말처럼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개미굴 같은 형태를 하고 있고 굴속을 이리저리 떠도는 소리들
메기는 시애틀 마이애미 캔자스 혹은 엘에이 어딘가에서
자신의 귓속말을 들어줄 사람을 향해 그렇게 계속해서,

물과 고기 물과 고기…… 중얼거린다

우리는 목이 긴 장화를 신고 눈보라 속을 걸었다,
그리고 갑자기, 어린 메기의 몸이 딸꾹질 하듯 허공을 튀어 올랐다 아니 로제 언니의 작은
다락이 울컥, 울컥거리며
눈보라 속으로 날아오를 태세였다

우리는 목이 긴 장화를 벗어던지고 와아,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로제 언니는 그렇지가 못했다
메기를 끌어안고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문신투성이 뚱보, 로제 언니

다락 속의 가루 가루 속의 난쟁이 난쟁이의 외투 외투 속의 구름 구름 속의 배지 배지와 낚시 낚시와 목이 긴 장화

오스본, 메기와 부기주니어 그리고 떠나간 냐라키 우리는, 우리들이 찾는 것은, 우리들이 도망치듯 찾아 헤매는 것은
음악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아름다운 센텐스

나에게 소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한 번만이라도
생긴 대로 살고 싶은 것
하지만 그게 안 돼서
말처럼 쉽지가 않아서
나는 엉망으로 늙어간다
내가 어리석다면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정말 어리석다면

아름다운 소녀는 더 아름다워지고
깊어진 사랑은 영원으로 가야 하는데

아름다운 소녀는 나빠지고
사랑은 깊어갈수록 진흙탕

내가 정말 어리석다면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정말 어리석다면
내가 만든 음악으로
나는 커서 멋지게 날아올라야 할 텐데……

(당신의 목소리는 참 이상하다
당신의 목소리는 자꾸만 나를 머뭇거리게 하지)
믿을 수가 없군 믿을 수가 없어

가난뱅이 창녀, 로제 언니는 결국 우리들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언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차갑고 날카로운 눈보라 속으로 멀어져갔다

굴속의 사람들

"…… 이봐요,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한마디만 해봐, 지난밤, 잠든 당신의 뺨에 입 맞췄을 때, 당신은 잠결에 속삭이듯 말했지, 로제, 로제로구나, 뽀뽀해줄 사람은 너밖에 없지, 그리고는, 달력의 숫자가 하나도 없네…… 그랬잖아, 당신, 왜 그랬어, 무슨 꿈을 꿨길래, 그런 당신의 모습이 어쩐지 너무 가엾어서, 당신이 내게 해준 팔베개를 풀려고 하자, 당신은 나를 와락 끌어안았지……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이봐요,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한마디만 해봐, 우리는 오늘 낚시를 가기로 했는데, 당신이 모든 걸 망칠 셈이군, 왜 그랬어, 바보 자식, 지금 네 얼굴이 어떤지 알아? 넌 곧 죽을 것 같아, 이 약해빠진 검둥이 자식아, 내가 누군 줄 아니? 내가 누군 줄 알아? 너에게 총질을 한 그 자식들을 내가 가만 둘 것 같아? 어서 일어나, 지금 당장 그 자식들의 머리통을 내가 벌집으로 만들어줄 테니, 제발 이 불쌍한 자식아, 사랑을 하면 왜 모든 게 진탕이니, 말해봐, 우리 애기, 어딨어. 나쁜 냄새가 나는 우리 애기……"


4

나는 아직도 비밀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 세상엔 말이다

날 수도 없을 만큼 뚱보가 되어버린 새, 로제
그리고 냐랴키
난쟁이는 우선 작은 녀석을 뜻하지만 감춰진 몇 개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다락방, 가루, 가루 속의 난쟁이 난쟁이의 외투 외투 속의 구름 구름 속의 배지 배지와 낚시 낚시와 목이 긴 장화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비밀을 한두 개쯤 간직하고 있지만
그것이 음악이 되기 전엔 차가운 동전이거나 혹은 주머니 속의 밀떡

오스본, 메기와 부기주니어 그리고 떠나간 냐라키 우리는, 우리들이 찾는 것은, 우리들이 도망치듯 찾아 헤매는 것은
굴 속의 사람들
굴 속의 노래
음악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아름다운 센텐스.

─시집, 『트랙과 들판의 별』


 나는 왜 하필이면 이처럼 길고 긴 시를 끝까지 인용했는가. 하필이면 황병승의 다른 시에 비해서도 호흡이 너무 길고 길다 못해 상/하 2부로 갈라놓기까지 한, 거의 단편소설 길이에 준하는 이 시를 끝까지 읽어보자고 제안했을까. 그 이유는 만일 이렇게나 길고도 황당한 내용을 담은 시를 끝까지 재미있게 토씨 하나 거르지 않고 단숨에 읽어낼 독자가 있다면, 그리고 읽고 난 후에도 이 시에 대한 진정한 애착과 관심, 미련을 느낀 나머지 다시 한 번 더 읽고 싶다는 독자가 있다면, 이 경우에 이 시는 친절한 부류에 속하는 시인가 아니면 그래도 여전히 길고 지루한 측면을 면죄 받을 수 없으므로 불친절한 시로 분류할 것인가. 이와 반대로 이 시를 읽기 시작하자마자 처음부터 거부반응, 스토리텔링이 수상하다 싶더니 거듭되는 비논리적 비이성적 넋두리, 잠꼬대로 이어지는 문맥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결국 지겨움과 지루함만 누적시킬 뿐, 읽기를 중도에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실토하는 독자가 있다면 이 시는 과연 불친절하기만 시로 남을 것인가.

 같은 시를 감상하는 데 독자의 태도는 이렇게 다를 수 있다. 대체로 판이하게 다른 비판의 잣대로 독자들은 다른 목소리를 낸다. 이처럼 극단적 양극으로 갈리는 독자층을 이루는 시가 포스트모던 계열의 시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반응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예의 시는 포스트모던 계열의 시 중에서도 환상적 리얼리즘에 경도된 마법적인 시이다. 전통적 서정시에 길들여져 단순 서정만을 고집하는 수구적 독자들에겐 당연히 잘 읽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낯설며 이해가 되지 않는 배타적인 시가 될 것이 명백하다. 문제는 이렇게 잘 읽혀지지 않고 낯설다는 이유로 그 시가 독자에게 불친절한 시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위 시를 읽고 어떤 사람은 말한다. ‘시가 독자의 감관을 새롭고 섬세하게 자극한다.’ 낯선 기법은 오리려 정신을 화들짝 깨워 청량제 역할을 하고 비논리적인 비유와 생경한 문체는 찌릿찌릿 혁신적 자극으로 다가왔다고 말한다. 그런 독자에게 이 시는 분명 불친절한 시가 아니다. 그런 독자는 이미 근대적 해체시를 ‘창작적 책읽기(에드워드 사이드) 독법으로 읽어낼 지적 수준에 도달한 아주 잘 훈련된 독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서를 통한 수준 높은 지적 훈련을 끊임없이 쌓아온 독자라 할지라도 포스트모던 계열의 시나 무의미의 시, 아방가르드 기법에 의한 시에 대해서 유독 알러지 반응부터 일으키는 독자가 따로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전자/후자 어느 경우라 할지라도 이 시는 친절/불친절과는 다른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시를 소비하는 독자의 취향, 판단력, 이해의 척도. 가치관 또는 인생관을 언어를 통해 동시대(contemporary words)를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고 그러므로 동시대에 동참하는 참여정신으로 시를 이해하려는 태도에 대하여 시의 본질적 의표와 연결 지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시는 왜 독자에게 불친절한가?」라는 제하의 글쓰기 청탁을 받고 근 한 달 동안 깊은 혼란에 빠졌었음을 고백한다. 전화가 걸려온 그 날 얼결에 예, 써보겠습니다, 부족한 제게 멋진 논제를 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덧붙였던 기억, 또렷하다. 그런데 정식 원고청탁서가 오고 송고날짜가 다가오자 겁이 나고 아무것도 써지지 않았다. 처음 전화를 받던 날의 자신만만하던 용기와 패기는 두려움으로 변했다. 그 이유는 처음 청탁에 응하던 순간엔 무의미(無意味)의 시(詩)이거나 해체시의 계열, 속칭 미래파로 일컫는 포스트모던 경향의 시에 대한 이해와 수용, 그에 부응하는 독자들의 바람직한 자세쯤으로 논지를 잘못 파악했던 것에 원인이 있다. 즉 난해한 현대시에 대한 변별력과 그에 대한 이해의 확충, 옹호론쯤으로 가닥을 잡아가려했다. 그러다가 청탁내용을 다시 살펴보니 현대시는 과연 ‘왜 독자에게 불친절한가?’와 ‘난해하다는 것은 곧 불친절한 것’과의 관계는 반드시 동의어가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 그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는데 이 문제는 나를 크게 고무시켰다. 난해 = 불친절, 그 상관관계와 상관없이 현대시는 왜 난해할 수밖에 없으며 시의 생산자인 시인과 시의 소비자인 독자와의 관계에서 난해시가 당면한 운명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그리고 그 난제를 풀어나간다면 시는 독자에게 낭만주의 전후의 고전적 문예사조로 퇴행하는 과잉 친절이라도 베풀어야 할 것인가. 그렇게 되면 시대를 앞서가야 하는 예술가의 직분과 배치되는 행위이므로 근대 예술은 정말 원본 없는 시뮬라크르로 일천한 포스트모던에 의한 복사본 양산에만 기대게 될 것인가. 등등, 이런 생각들로 글쓰기는 점점 혼란에 빠졌다.

 현대시가 대책 없이 어렵기 때문에, 시가 너무 개별적이고 시인은 언어의 착란을 일부러 조장한 나머지 해석불능의 상태를 불러오기 때문에 독자를 잃고 있다는 사실은 어쨌든 우리를 긴장시킨다. 그러나 무의미 시작법의 전형이 된, ‘상식과 질서의 파괴’, ‘비논리성’, ‘엉뚱한 발상과 빠른 국면전환’ 및 ‘우연성에 기대는 편집광적 애착’ 등 소위 근대성을 표방하는 하이퍼텍스트 문체는 아무리 생각해도 근대성의 특질에서 빠뜨려 간과해야 할 상황이 아니다. 현대시는 어쨌든 기성질서와 기존의식을 과격하게 무너트려 함몰시킨 그 자리에 지극히 비이성적이고 개인적인 신화로 대체, 이식하지 않을 수 없는 복잡성을 지닌다. 그 때문에, 시는 독자에게 쉽사리 다가설 수 없는 벽으로 느끼게 되는 것. 그런데 이런 국면이 불친절의 사유가 되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혀 큰 혼란에 빠진다는 얘기이다.

 그러므로 현대인인 우리는 정신적으로 싸이키델릭 psychedelic해지며 난해해지기만 하는 현대시의 어깨를 도닥거려 위무하고, 시의 소비자인 독자의 애정 어린 관심을 이끌어 낼 방안은 없을까, 하고 여러 각도로 궁리하게 된다. 하지만 결론은 모든 예술 장르가 다 그렇듯이 예술가는 예술의 소비 대중보다 한 차원 앞서가야 할 의무를 여전히 지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난해한 시인들의 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것을 불친절로 간주하여 투덜거리는 독자들의 태도는 온당하지 않을수도 있지만 그 또한 현대시가 당면한 과제, 현실이므로 이 상황 또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우리가 차선의 방법으로 취해야할 자세는, 적어도 한 시대를 앞서가는 시인의 지적수준을 기꺼이 따라가고자 하는 양질의 독자층을 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난해한 시의 제작자인 시인과 상통하려면 그 시인과 동일 선상에 이르는 지적 수준에 근접하기 위한 지적 훈련을 쌓아가는 사회적 분위기가 우선 조성되어야한다는 얘기이다.

 난해시와 난해성, 독자의 반응에 대한 좋은 예는 초현실주의 도입기에 나타난 ‘오감도’사건이 대변한다. 1934년 시인 이상의 연작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 중일 때, 어리석은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허튼 수작 그만하고 연재를 즉각 중단하라고 조선중앙일보 편집부에 난동적인 욕설이 쇄도했다는 것이다. 이때 천재 시인, 이상의 차원 높은 시세계를 누구보다 먼저 잘 간파하고 있던 당대의 천재 소설가, 이태준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 내다본 견자로서의 편집부장인 이태준, 그는 저급한 일반대중의 속된 행동에 일단 대응하지 않고 연재를 계속 밀어붙이다가 ‘무슨 개수작이냐!’고 거칠게 항의하는 독자들의 폭거에 부딪혀 결국 조선중앙일보 편집부장 자리에서 파직하게 되는 사태로 마감한 일화를 우리는 기억한다. 그렇다면 그 당시 이상의 시, 오감도는 이해불능, 엉터리, 불친절한 시였던가. 연재를 중지당한 이상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고 전한다. 50년 후에는 누구나 내 시를 이해할 텐데…, 라고. 그의 시는 그런데 오감도 연재 중단이후 20년이 채 안 된 1950년대 초 우리의 국정교과서에 중요한 시로 상제되어 후대의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참으로 뒤늦은 평가. 그러나 당대에 최고의 문명을 떨치던 이태준에게는 이상의 초현실주의 어법이 처음부터 난해하거나 이상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그 시는 처음부터 불친절한 시가 아니었던 것이다.

                                                                        *
 인용 시로 돌아가서. 혹자는 황병승의 시가 어렵다고 말한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논리가 서지 않고 황당무계, 요령부득,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린다. 그 투덜거림 속에는 그의 시를 시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부정적인 의식이 얼마간 깔려있다.
필자는 위 황병승의 시가 조금도 낯설지 않다. 뿐만 아니라 언어와 언어가 적절한 유대를 유지하며 낯선 구문과 엉뚱한 발상으로 문맥을 긴장감 있게 이끌어나가는 근대적 감각의 전개가 참신하고 멋있어 보인다. 더구나 지루하다 싶으면 시의 외곽에 풀어놓은 외재율이 밖으로 따라나와 상큼한 음악적 리듬까지 담보해 준다. 그리하여 시의 행과 행 사이로 이어지는 산뜻한 기류가 의미대신 리듬(리듬도 상징이다)으로 유통되는 발랄함, 생기로 넘친다. 그의 시는 낱말 하나하나에 생명이 실린다. 시 전체뿐 아니라 시어들이 모두 활기차게 원기왕성하며 생동감을 발산하는 것이다. 이런 시를 과연 낯설다고 할 것인가. 낯익지는 않으나 거부감 없는 참신함, 혁명적인 감각이 창출된다면 이 시에 대한 평가는 달라져야 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문제는 이런 시를 읽어낼 독자의 기본자세와 자질이 문제이다.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고 좋아하려면 끊임없이 클래식 쪽으로 귀를 훈련시켜야하는 시간 투자가 선행되어야 한다. 유행가는 큰 노력 없이도 쉽게 귀에 닿아 들어오지만 난해한 교향곡을 지루하지 않게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은 음악에의 헌신, 투자가 뒤따라야함이 당연한 것이다. 같은 이치로 새로운 시, 난해한 시를 읽어내려면 현대시를 주제로 하는 해체적 독서법을 통해 지적 훈련을 쌓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노력하여 자질을 기른 독자와 그렇지 않고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 기존 질서에 대한 향수에만 젖어 수구적, 보수적 성향을 띠는 사람들과의 차이는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을 미리 얘기하자면 시란 독자의 성향과 자질에 따라 다를 뿐, 친절한 시도 불친절한 시도 없다.

 그런데 지적 수준이 같은 독자들끼리 서로 상반된 입장을 취한다면 서로 다른 인식과 반응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황병승의 시를 즐겨 옹호하는 독자는 과연 시인이 의도한 시의 텍스트를 정말로 정확히 이해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일까. 꼭 그런가,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정한 의미에서 예술작품 감상이란 ‘이해하기’,가 아니다. 예술작품 감상법은 느끼기(감상) 그 자체여야 할 것이다. 때문에 이해하기에 앞서 그냥 느낌이 전하는대로 그냥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샤르트르)이기 때문에. 그 느낌, 그것이 바로 감상자의 것(재산)이 된다는 얘기이다. 그런 자세야말로 예술작품을 해체적으로 감상하는 창작적 책읽기의 기본으로써 작품의 본질에 가장 잘 근접하는 자세가 아닌가싶다.


부기: 현대시를 대하는 두 개의 시선, 아니 여러 갈래의 길과 초점

                               가. 임보의 ‘무의미(無意味)의 시’에서 내용 발췌한 글

 내 개인적으로는 '무의미 시'를 별로 달갑게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유'가 지나쳐서 '방종'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 '자유'는 사물과 세계를 만신창이로 파괴하기도 하고, 이질적인 사물과 사물들을 폭력적으로 결합하여 낯선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그 '자유'는 세계에 대한 부정―곧 허무정신에 닿아 있습니다.
경계해야 할 것은 마치 시는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으로 써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상한 풍조가 우리 시단에 생겨난 것도 같습니다.

 해체시의 시도는 이상(李箱) 한 사람으로 충분하듯이 무의미 시 역시 김춘수 한 사람만으로 족합니다. 그를 흉내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누구의 모방이 아닌 자신만의 시풍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임보 (시인)

                              나. 황장우의 ‘임보의 무의미시에 대한 오해’에서 발췌한 글

 (시인 임보의) 무의미의 시학은 혼탁한 인간 정신 이전의 언어와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한 시학임으로 그 자체가 의도적인 언어의 장난이나 비정상적인 정신의 비틀림 정도로 치부한다면 문제 있는 시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를 어느 정도 쓰는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임보의 시를 대하는 태도는 바람직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무의미시 혹은 해체시를 쓰는 일부의 시인들이나 초심자들이 무의미와 해체의 진정성을 정신과 체험으로 습득하지 못한 채 단지 경향자체에 편승하여 동 시인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의미시의 가치가 저평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대상이나 언어에서 무의미를 직관할 수 있는 시인이 몇이나 되는지 나는 회의적입니다. 무의미시의 시적 아름다움이란 의미를 가진 어떤 시 보다도 결코 뒤지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싶습니다. 임보의 편견은 아래(생략)의 무의미 시에 대한 잘못된 정의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황장우(시인)


*무크지, <화요문학 > 2008년 가을13호에 발표

 

김영찬(시인): 계간 <문학마당>과 격월간 <정신과표현>에 지면을 얻어 문단화동 시작.

                   시집 <불멸을 힐끗 쳐다보다> 및 <투투섬에 안 간 이유> 등